149호 > 기고·칼럼 >기자수첩
듣고 싶다는 말
등록일 2018.06.08 00:19l최종 업데이트 2018.06.08 00:20l 이누리 기자(nurizto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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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좁은 시야에 담기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사회의 부조리니 불평등이니 하는 문제들에 대해 말하려면 그 이면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권과 연대를 운운하는 내 언어가 사실 텅 비어있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이었을 수도 있고, 남들이 잘 모르는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멋지지 않을까 하는 허영심이었을 수도 있겠다. 더 알고 싶었다. 알고 말하고 싶었다. <서울대저널> 지원서에 있던 지원 동기를 묻는 문항을 보고 ‘모르는 게 많고, 그만큼 알고 싶은 것도 많기 때문’이라는 답을 적어넣었던 것은 그런 욕심에서였다.

  한국의 무슬림에 대한 기사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한국에 사는 무슬림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는 상태에서 궁금하다는 생각만으로 던진 기획이었다. 제대로 취재를 시작하기도 전에 제목을 정했다. 무작정 낯선 곳에 가서 인터뷰를 하고, 들은 것들을 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무슬림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인천으로 출발했다.

  당연하지만 착각이었다. 인천에서 마주친 한국인 무슬림들의 삶은 모두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슬람을 운명이라 칭했고 누군가는 행복하기 위해 믿는다 말했다. 무슬림으로 살아온 시간이 20년을 넘긴 사람과 2년이 채 안 된 사람, 솔직한 사람과 조심스러운 사람. 표정도 말투도 성격도 모두 제각각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경험들 앞에서 내가 그것들을 담기 위해 준비한 그릇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작은지를 봤다.

  기사를 쓰고 나면 한국인 무슬림에 대해 조금은 말할 수 있게 되리란 믿음이 얼마나 어설픈 것이었는지 깨닫고 이내 부끄러워졌다. 한국인 무슬림에 대해 안다는 것은 한국인 무슬림을 내 얄팍한 말들로 정의할 수 없음을 안다는 것과 같았다. 내가 만난 이들은 한국인 무슬림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닌 각자였다. 어떤 특성을 지닌 사람들의 삶을 알기 위해 그 당사자를 만나본다는 것은 그를 매개로 집단의 삶을 꿰뚫어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삶 또한 내 삶과 똑같이 복합적이고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과정임을 그들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공감과 연대, 이성적인 분노는 모두 그 다음의 일이었다.

  기사를 쓰며 느낀 부끄러움을 있는 그대로 마주보고자 한다. 내가 멋대로 이름붙인 상자에 서로 다른 삶들을 수납하려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공부하고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보고 듣는 일임을 새긴다. 이제는 더 알고 싶다는 말이 아닌 더 듣고 싶다는 말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