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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학생연대활동 - 정체된 세상 속에서 흐르고자 하는 삶들
등록일 2018.09.13 12:55l최종 업데이트 2018.10.19 13:38l 이민주(사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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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누군가 농민학생연대활동 존속을 확실히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근거를 듣길 희망하며 “대학생들이 왜 아직까지도 굳이 농활을 떠날까요?”라고 묻는다면, 사실 “그냥 그 행사가 있어와서.” 외에는 해줄 말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농활이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는지?”를 질문하는 것이고, 그 질문은 결국 농활을 떠난 개개인들이 쌓은 소중한 경험과 의미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그냥 있어서 떠난 행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돌아오는가?”를 모두가 기억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농활을 지속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나의 글도 수천 가지의 반추 중에 한 가지 정도일 것이라 생각한다.

  또 누군가 나에게 농민학생연대활동에서, 농민과 학생 간의 연대가 흐려지지 않아야 할 대단하고 이론적인 이유를 설명해주길 바란다면, 또 달리 할 말이 없다. 연대에 대해 대단한 이유를 찾는 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대단한 이유를 찾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단히 고통스럽고 대단히 정의롭기 때문에 농활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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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활을 떠나서 농사일을 해보면 입에서 절로 나오는 말이 “죽겠다.”다. 농활 하루 이틀 쯤 되면 모두들 근육통을 호소한다. 농민은 우리 작업량의 수십 배 되는 강도와 시간으로 매일 농사일을 한다. 작업을 해본 뒤에 농업 교양을 이야기하면 “왜 쌀 아껴먹으라는 건지 알겠다.” “이렇게나 일하는데 그것 밖에 못 받는 건 정말 말이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농업 교양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한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농민의 진술이 나온다. “다들 연매출 2억만 이야기하지, 빚이 3억이라는 건 이야기하지 않는다.” 무엇이 농민의 삶을 이토록 어렵게 하는가? 시장 수요를 예측할 능력이 없는 농민은, 해마다 임의적으로 유행하는 작물들을 따라가기에 바쁘고, 유행 작물을 생산하는 농가가 너무 늘어나 가격이 폭락하면 그 손해는 또 오롯이 농민이 지게 된다. 과거 수매제도를 통해 농산물 공급량을 어느 정도 안정화했던 정부는 수매제 폐지, FTA 등의 개방정책을 결정하면서 농업을 자유방임의 늪으로 빠뜨렸다. 농민들의 삶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유행 작물을 결정하고, 작물의 종자를 사유화하고, 농업과 관련된 기술 그리고 농업 시장과 생산`유통 과정 전반을 쥐고 있는 것은 세계 독점 자본이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낮에는 햇빛과 더위를 감내하며 한 공동체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이 정작 농업에 대한 통제력은 갖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농업은 인류 역사 아주 초기부터 지속되어온 인간의 활동이다. “땀 흘린 만큼 땅은 내어준다.”는 원초적인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그러나 지금 자본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 가로막힌 혈관 반대편에 노폐물이 쌓여가듯, 가로막힌 세상 저편에서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 그리고 농민의 고통은 점차 쌓여가고 있다. 더는 땅은 땀 흘린 만큼 내어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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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들의 삶에 대해 나는 ‘처절함’으로 표현하고 싶다. 우리 모두 스펙 쌓으랴, 성적 챙기랴, 대외 활동하랴 바쁘다. 시험기간만 되면 다들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를 토로하고, 하지만 결과는 이만큼밖에 되지 않는다며 절망한다. 우리는 처절하다. 그리고 가장 처절해야만 겨우 나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래도 이만큼 힘드니까. 이만하면 열심히 살고 있나봐. 도태되지는 않을 거야.’ 누군가가 경쟁 사회라고 떠드는 것조차 소리조차 우스울 정도로 우리 모두가 서로를 구분하고 평가하고 비교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땀 흘린 만큼 세상이 나에게 뭔가를 내어줄지 확신할 수 없는 시대다. 취업은 할지, 취업해도 잘리지는 않을지, 계속 일할 수는 있을지, 돈은 얼마나 벌지, 알 수가 없다. 잘되려니, 잘되겠지, 믿으면서 살 뿐이다.  

  농활을 가면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오롯이 마주하기엔 세상과 개인을 가로막은 장벽들이 너무도 많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는 세상을 빗겨 보아왔구나.’ 그리고 그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 

  아무도 세상이 바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 세상 속에서 그냥 개인들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한 사람이 자신의 혈관이 막혔을 때 그저 터지고 피 흘러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듯이, 사람들도 그저 정체되어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괴로울 수밖에 없고 처절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세상이 관계 지어져 있다면, 인간은 그것을 바꾸고자 할 것이다. 계속 괴롭고 처절하기만 한 세상은 정체된 세상이고, 인간인 피처럼 끊임없이 흐르고자 할 것이다. ‘정체된 세상에 흐르는 삶들이 있다.’는 말은 그런 의미로 한 것이었다. 

  연대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하면서, 그 사람 개개인 속에 있는 정체된 세상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흐른다면 장벽을 뚫을 수 있으리란 믿음을 그렇기에 얻고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