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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컵들은 깨져야만 했을까 이제는 성평등한 사회라는 말에 부쳐
등록일 2018.10.25 12:58l최종 업데이트 2018.10.26 17:25l 여동준 기자(yeodj@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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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대학생 시절, 학생 운동의 최전방에 계셨다. 수배령이 내려져 도망다니고 그러다 붙잡혀 물고문을 당하신 적도 있다고 하셨다. 이상했다. 우리 집안에서 아버지가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는 모습을 맹세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시기 전까지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에만 충실하셨고 어머니께서는 가사노동과 육아에 충실하셨다. 그렇다. 전형적인 ‘어머니’다운 어머니였고, ‘아버지’다운 아버지였다.

  학생 운동을 했다면 마땅히 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있고 그 사실이 생활에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재밌게도 취재하는 과정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컵깨기 운동. 어째서 컵들은 깨져야만 했을까. 운동권 내의 성차별적인 문화를 공론화하기 위해 조직의 컵을 깨는 퍼포먼스였다고 한다. 왜 여성들만 컵을 닦아야 하냐는 목소리를 어떻게 더 이상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익명을 요청한 A교수는 성차별적인 문화는 운동조직을 지켜야 한다는 보위 논리에 묻혀 문제제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오히려 사회 평균수준의 젠더의식 보다 현장의 젠더의식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설득력 있었을 정도였다고.

  그제야 아버지의 양면적인 모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납득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떳떳할까. 아버지와 다르게 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있고 이를 실천으로 옮기고 있을까. 고민은 결국 진부하게도 아직 부족하고 더 노력해야겠다는 자기반성으로밖에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성평등한 사회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최종범 씨가 구하라 씨에게 성관계 동영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무릎을 꿇고 빈 것은 누구였는가? 사회적 낙인에 두려웠던 것은 누구였냐는 말이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에 수많은 여성이 공감했던 것은 무슨 뜻일까? 조현병을 앓고 있던 정신이상자 개인의 유별난 소행에 말이다.

  다행히 수많은 컵들이 깨져나가고 있다. 혜화역 시위에서, 미투 운동에서 수많은 여성은 자신의 컵을 깨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최종범 씨의 협박에 대한 피해자의 반응은 아직도 깨질 컵이 많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런 현실에서 내가 직접 컵을 깨지 못하겠다면 깨는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시대를 이끌지 못할지언정 시대에 잡아먹혀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