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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이 평범한 이웃이 되는 날까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한가은 사무국장을 만나다
등록일 2017.09.08 01:03l최종 업데이트 2017.09.08 17:54l 한기웅 기자(surfpengu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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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은'으로도 불리고레티마이투로도 불린다. 베트남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한국인과 결혼하며 한국으로 이주하고 이제는사단법인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이여인터)’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한가은 씨의 이야기다. 처음엔 한국어도 못했던 국장이 사무국장이 되기까지 10 동안 성과도, 어려움도 많았다.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이주여성들의 보금자리에서이주여성 당사자 활동가한가은 사무국장을 만나 그의 삶과 이주여성의 인권실태에 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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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한가은 사무국장 ⓒ이가온 기자



인권활동가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한가은 사무국장의 고향은 베트남 북부 항구도시 하이퐁(Hải Phòng)시의 시골마을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하이퐁시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사람들이 이주해 나가기 시작했고, 뒤이어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나 유학생 신분으로 대만이나 한국행을 택했다. 국제결혼으로 인한 이주도 적지 않았다. 사무국장에게도 나은 삶을 위한 해외이주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국장은 경제적인 이유와 정보의 부족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어렸을 때부터 해온 농사일이 너무 힘들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되는 공장에 취직한다 해도 10 원의 박봉 이상을 기대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한 국장은 국제결혼에 눈을 돌리게 됐다. 해외이주를 선택한 지인들의 삶이 확연히 나아지는 것을 보며 마음을 더 굳혔다. 한 국장은 2005년 말 결혼중개사무소를 통해 만난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면서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으로 이주할 당시는 지금과 달리 비자를 받을 때 한국어 시험을 치도록 하는 규정이 없었다. 그래서 간단한 인사 외에는 한국어로 대화가 불가능했고, 집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우연히 이여인터를 만나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남편과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던 중 순대를 팔던 아주머니가 다른 베트남 여성을 소개해줬고, 그 친구의 소개로 이주여성 센터가 운영하는 한국어교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사단법인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국내 이주여성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설립된 비영리단체다. 2000년에 이주여성을 위 한 첫 비영리 단체로 시작해 2005년에 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은 이여인터는 어려움을 겪는 이주여성들의 보금자리로 17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가은 국장이 처음 이여인터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주여성을 지원하는 단체가 많지 않아 이여인터에 상담 문의를 하는 이주여성이 많았다. 한가은 씨는 베트남 이주여성들과의 상담에서 통번역 자원봉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인권활동에 첫 발을 디뎠다.


  정식 활동가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은 건 2007년이었다. 그해 2월 11일 여수시 출입국관리소의 외국인 보호시설에서 화재로 10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가 시민단체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이여인터 역시 지원금을 받으며 인력 충원이 가능해졌고, 그렇게 한 씨는 정식으로 활동가의 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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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세계 인종차별철폐의 날을 맞아 집회에서 발언 중인 한 사무국장 ⓒMWTV



든든한 버팀목이 있어 가능했던 10년


  한가은 국장은 센터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10년차가 됐다. 처음엔 우체국 방문이나 복사 같은 단순 실무보조로 시작해 홈페이지 관리, 기부금 영수증 발행, 회계와 세무신고 등 점차 복잡한 업무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특히 문서에 도장을 찍는 일을 참 좋아했다”며 업무를 마무리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09년부터는 ‘한울타리상담센터’에서 3년간 상담사로 근무했고, 상담센터가 해소된 이후에는 서울시가 후원해서 만든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에서 선임상담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2015년에는 이여인터로 돌아와 인권팀장을 맡다가 올해 사무국장이 됐다. 현재는 이주여성쉼터에서 퇴소한 가정폭력 피해 이주여성들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와 쉼터에 입소한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 프로젝트 등을 담당하고 있다.


  한가은 국장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까지는 숱한 어려움이 있었다. 활동 초기에는 한국어가 서툴러 보이스피싱으로 오해를 받은 적도 있었고, 한국인을 바꿔달라는 요청에 주눅이 들기도 했다. 상담 업무를 할 때는 내담자들의 절망적인 얘기를 들으며 힘이 빠졌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공공기관개선 프로젝트였다. 이주민들이 공공기관에서 겪는 불편이나 차별을 파악해 해당 기관에 전달·교육하는 프로젝트였는데, 기관들과의 소통이 더뎌 진행이 힘들었다. 한 국장은 이 프로젝트 때문에 살도 빠졌다며 웃었다.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버팀목이 돼줬다. 국내 이주여성인권운동의 선구자이자 이여인터를 설립한 한국염 전 대표와의 인연이 대표적이다. 한가은 국장은 한 전 대표에 대해 “여성이 단체를 꾸리고, 후원을 받고,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해주는 일을 하는 모습이 멋있어보였다”며, 특히 자국 사람도 아닌 외국인을 위해 돈과 시간, 노력을 쏟는 모습이 더욱 존경스러웠다고 덧붙였다. 저녁도 주말도 반납하며 이주여성을 위해 매진하는 한 전 대표를 닮고 싶었던 한 국장은 귀화할 때도 그의 성을 따서 자신의 이름을 지었다. ‘가은’은 베트남 이름의 뜻 ‘가을’을 발음하기 쉽게 바꿨다.


  도움을 준 사람으로 허오영숙 상임 대표도 빼놓을 수 없다. 이여인터 사무처장으로 재임하다 올해 상임대표가 된 허오영숙 씨는 한가은 국장의 입사 동기다. 한가은 씨가 한국어로 어려움을 겪을 때 신문기사를 같이 읽어주고 업무에 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퇴근하고 저녁시간에 따로 일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 국장은 한국염 전 대표를 “멋있는 왕언니”로, 허오영숙 대표를 “나를 잘 챙겨주는 언니”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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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씨는 이주여성 한국어교실을 계기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인연을 맺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이주여성이 잘 살아야 선주민도 잘 산다


  한가은 국장은 한국에서 이주여성은 성, 인종, 계급 세 가지 층위의 차별에 노출된다고 말한다. 이주여성을 만만하게 여기는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이주여성들은 빈번히 멸시와 성폭력의 대상이 된다. 한 국장은 최근에 한 필리핀 이주여성이 택시기사로부터 성매매 제안을 받았다며 도움을 요청한 일화를 예시로 들었다.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여성의 경우 매일같이 인종차별에도 노출된다. 같은 이주여성이라도 미국이나 캐나다 등 소위 선진국에서 온 여성들과 개발도상국에서 이주한 이주여성들에 대한 선주민들의 대우는 극명하게 대비되곤 한다. 상당수의 이주여성은 경제적으로도 취약한 계층에 속한다. 그중 일부는 ‘내가 결혼비용을 많이 냈으니 너는 일해서 돈을 갚아야 한다’는 남편의 주장으로 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혼자 짊어지기도 한다.


  각종 차별과 더불어 이주여성들이 마주하는 큰 어려움은 바로 체류문제다. 이에 대해 한가은 국장은 “남편에게만 권력이 주어지는 정책구조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처음 국제결혼을 한 외국인은 3개월 비자로 입국해 외국인등록을 해야 하고, 2년이 지나면 국적이나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에 배우자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이 다. 남편이 직접 작성한 초청서와 신원보증서가 꼭 필요한 이주여성의 입장에서는, 가정폭력을 당하는 등 인권침해의 피해자가 돼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렵다.


  이혼을 하는 등 가족의 형태가 바뀌어 ‘정상가정’의 범주를 벗어날 경우 어려움은 더 커진다. ‘정상가정’에 속한 경우 면접심사만 받으면 되는 데 비해 그렇지 않을 경우 영주권이나 국적을 취득하려면 필기와 실기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대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며 홀로 자녀를 양육하는 이주여성에게는 이런 시험을 준비하는 일이 쉽지 않다.


  여전히 어려움이 많지만, 한가은 국장은 지난 10년간 긍정적인 변화들이 분명 있었다고 평가했다. 한 국장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이주민을 지원하는 기관이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서울시의 모든 구에서 다문화지원센터가 최소 하나씩 운영되고 있다. 2006년에는 24시간 상담을 해주는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도 생겼다. 이주민의 인권을 위한 시민단체도 많아졌고 이주민들 스스로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 속에 당사자들이 스스로 내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한 국장은 당사자 활동가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가장 큰 걸림돌은 외국인 신분으로 인권활동을 하다가 체류가 불안정 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강의나 인터뷰 자리에도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그런 그를 활동의 무대로 이끈 건 ‘당사자들이 자기 문제에 나설 때 가장 강력하다’는 생각이었다. 치열한 성장을 거쳐 그는 이제 수많은 학교와 공공기관, 시민단체들을 누비며 ‘납치혼’ 문제부터 다문화 정책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가 됐다. 2014년에는 직접 제작한 단편영화 ‘이주여성의 체류이야기’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 국장은 다문화가정에 대한 선입견을 다룬 영상 ‘당신의 가족은 몇 문화 가족입니까’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이주여성에 관한 콘텐츠 제작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국염 전 대표는 저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에서 이주민이 잘 사는 사회가 되면 선주민도 잘 사는 사회가 된다고 말한다. 다양한 층위에서 차별을 경험하는 이주여성들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면 이주민과 선주민 모두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동안 이주여성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 활동가로서 이주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한가은 국장의 존재는 더욱 소중하다. 한 국장의 활동이 이주여성을 위한 사회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