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호 > 특집
죽음학자가 말하는 죽음 정현채 전 서울대학교 소화기내과 교수를 만나다
등록일 2018.10.25 23:57l최종 업데이트 2018.10.26 17:20l 유서희 기자(cow110358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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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란 무엇일까. 먼 훗날의 일이거나 남의 일, 혹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인간의 죽음과 생명을 다루는 학문인 ‘죽음학’이 탄생했다. 우리가 깊이 고민하지 않는 죽음을 학문적으로 탐구하자는 취지다. 학자가 많지는 않지만, 죽음학은 1900년대부터 꾸준히 연구가 이뤄졌다. 죽음학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종교, 철학, 사회복지학 등과 함께 학제적으로 접근하는 융합학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1997년 한림대학교 철학과 오진탁 교수가 ‘죽음준비교육’ 과목을 개설하면서 죽음학 연구가 시작됐다. 이러한 죽음학이 특히나 발붙이기 어려운 분야는 의학계다. 사람을 살리는 것을 소명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10년 넘게 죽음학을 탐구한 사람이 있다. 바로 정현채 전 서울대학교 소화기내과 교수다. “잘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알아야 한다”는 정 교수를 찾아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과 그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방법을 들었다.


*수술 후 회복 중인 정현채 교수의 건강문제로 아내 이현숙 씨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죽음학이 가져온 삶의 변화, 암투병도 담담히


  정현채 교수가 죽음학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이다. 쉰 살이 된 그는 나이듦을 체감하면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두려움에 직면했다.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고민이 깊었던 정 교수에게 아내는 죽음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사후생(死後生)》을 선물했다. 책에는 죽음에 가까이갔던 사람들이 전하는 근사체험과 죽음 직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는 종말체험이 소개돼있었다. 모든 죽음학자가 근사체험이나 종말체험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 교수는 레이먼드 무디 주니어의 《다시 산다는것》, 정신과 의사인 피터 펜윅의 《죽음의 기술》, 방사선종양학 전문의인 제프리 롱의 《죽음, 그 후》 등 죽음학 서적과 세계적인 의학저널 Lancet 에 소개된 근사체험에 관한 논문을 근거로 근사체험과 종말체험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죽음학을 탐구하면서 그는 개인적인 삶의 태도에도 변화를 겪었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수십 년을 일 중심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주위를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그는 “죽음을 고민하면서 삶의 우선순위가 변했다”며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살게 됐다”고 말했다. 정현채 교수는 올해 1월 방광암 2기 진단을 받고 정년퇴직 예정일보다 2년 앞서 퇴직해 지난 8월 21일에 암 수술을 받았다. 보통 암이 찾아오면 환자는 자책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10여 년간 죽음학을 탐구해온 그는 달랐다. 정 교수는 “그동안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많이 방황했을 것”이라며 암을 담담히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퇴원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인터뷰 당시에도 그는 유머를 잃지 않았다.


  “죽음을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살게 됐다”는 정 교수는 한국에 죽음학을 뿌리내리기 위해 꾸준히 노력 중이다. 죽음을 의료의 패배로 보는 의학계에서 죽음 연구는 쉽지 않지만, 관심이 통하는 후배 의사들과 함께 ‘정현채 교수의 죽음학 강좌 나눔공간’이라는 네이버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죽음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카페에는 정 교수와 세계적인 죽음학자들의 죽음학 강연, 죽음 탐구에 도움이 되는 책과 영화 목록 등이 소개돼있고 죽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이밖에도 정 교수는 다른 학자들과 함께 한림대 생사학연구소의 공동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서울대 의과대학 학생들을 비롯해 일반인에게도 꾸준히 죽음교육과 자살예방교육을 진행해왔다.



죽음학자의 죽음 준비


  정현채 교수는 오래전부터 죽음을 준비해왔다. 틈틈이 죽음학 연구자료를 정리해 병원에 있는 의학역사문화원이나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도 죽음을 위한 물질적 정리의 일부다. 개인적 죽음준비로는 장기기증서약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유언장 등을 이미 작성해뒀다. 수년전 써 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바뀐 양식에 맞춰 올해 3월 새로 썼다. 계속해서 내용을 보완하고 있는 유언장에는 두 딸에게 전하는 삶에 대한 조언과, 남길 물건이 담겨있다. 가족에게 유언장을 전하는 일은 보통 죽음 직전에서야 이뤄지지만, 정 교수는 죽음을 주제로 가족들과 자주 대화를 나눴기에 자연스럽게 유언장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유언장 끝에는 그가 눈을 감기 전후로 읽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티베트 ‘사자의 서’ 앞부분을 요약해 놓았다. ‘사자의 서’는 막 육신을 벗어난 영혼에게 ‘당신은 이제 이승을 떠났으니 가족이나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빛을 보면 두려워 말고 그 속으로 들어가라’고 전하는 글이다.


  영정사진은 10년 전 갑작스럽게 폐렴을 앓고 나서 준비했다. 집 소파에 와인잔을 들고 앉아 웃고 있는 모습이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 대부분 증명사진을 복사해서 영정사진으로 쓰지만, 정 교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영정사진에 가족들이 기일에 제사 지낼 필요 없이 함께 와인 한잔을 나누며 같이 살던 때를 추억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장례를 어떻게 치르면 좋을지에 대한 사전장례의향서도 준비 중이다. 죽음이 삶과 다르지 않다는 그의 죽음관을 반영하듯 수의는 삼베처럼 특별한 것이 아닌 평상복을 입으려 했으나, 화학제품은 공해물질이 많이 나온다 해 면으로 된 옷을 입을 예정이다. 또한 나무를 태울 때 화석연료를 소모하고 싶지 않아 종이로 만든 관을 사용하겠다고 적었다. 장례는 인천부두에서 배를 타고 1킬로미터 떨어진 부표까지 가서 유골을 뿌리는 해양장으로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환경문제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죽음을 알릴 사람들의 범위,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을 위해 틀 200곡이 넘는 음악의 목록도 사전장례의향서에 포함했다.


  정 교수는 물질적 마무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의 마무리라고 강조했다. 죽음 준비는 곧 마음의 짐 없이 가볍게 떠날 준비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용서할 사람이 있으면 빨리 용서하고, 용서를 구할 사람이 있으면 빨리 구하는 것이 죽음 준비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그가 은퇴 당시 고별강연을 “본의 아니게 내가 상처를 준 분들이 있다면 용서해달라”는 말로 끝맺은 이유다.


  “우리는 모두 무제한 여권을 가진 시간 여행자 / 힘들기도 했지만 보람과 즐거움이 함께했던 인생 수업을 마치고 본향으로 복귀합니다”. 2017년 10월 30일 진행한 죽음학 강의에서 정현채 교수도 청중과 함께 묘비명을 적었다. 그의 죽음관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묘비명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정 교수는 “죽음이 끝이 아니기에 가까운 사람들을 보듬으며 이번 생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웃어 보였다.



잘 죽어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