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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에 관하여
등록일 2019.06.11 10:54l최종 업데이트 2019.06.11 11:13l 유명순(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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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건학자인 나는 하는 일 거의 대부분에서 건강을 다룬다. 이때의 건강은 질병이 있고 없음의 이분법이나 태어날 때의 신체·정신 조건이 결정하는 운명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건 학자들이 강조하는 건강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이고, 따라서 서로 간에 차이가 나는 건강 수준은 각자 알아서 고쳐야 하는 팔자소관이 아니라 사회정책과 공동체의 연대로 극복되어야 하는 목표이자 성과다. 건강은 사람이 살면서 품고 추구하는 꿈, 계획, 목표를 실현하도록 하는데 필수적이고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역동적이고 수준 높은 인구집단의 건강과 웰빙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신 건강이 중요하다. 이 점은 세계보건 기구(WHO)의 “No health without mental health” 캠페인 문구에서도 엿볼수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정신건강을 정신질환 문제로 치환하여 이해하곤 한다. 정신질환자가 아닌 이상 정신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의 구조와 관계가 수반하는 의미들과 그것이 개인과 집단에게 일으키는 감정경험 같은 일상세계의 문제들이 빠져나가 버린다. 감정의 안녕함은 정신건강의 핵심인데도.

  최근 성인은 물론 청소년의 감정이 위험한 상태라는 정신의학 전문가의 진단이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된 갈등이 초래하는 혐오의 표출이나 제어되지 못한 분노가 일으키는 사건사고가 증가하면서, 발생 이후에 개인의 정신병리와 그것이 초래한 일탈에 경악할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를 위협하는 감정에 사전 주목하라는 엄중한 경고 또한 계속되고 있다.

  ‘울분’은 이런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발굴하게 된 융합 연구의 주제다. 울분은 한자어 鬱憤 영어 embitterment로 표현되는데, 사전에서는 ‘마음에 답답함과 분노가 가득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문학작품에서도 울분을 찾아볼 수 있다. 1939년 박래홍의 시에서 울분은 “날고 뛰고 싶은 이리와 같은 마음”으로 표현되었고 이동규의 소설 《울분의 밤》에서는 “수치스럽고 화나고 괴로운 마음이 착잡”한 주인공 혜영의 마음을 울분으로 묘사한다.

  외상후울분장애를 연구한 독일의 정신과 의사 마이클 린든은 책 《울분》 서문에서 ‘울분은 누구나 아는 감정이며 정상적인 감정’이라고 했다. 학술적인 정의를 동원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겪어서 아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스위스의 심리학자 즈노이는 울분은 분노나 슬픔 같은 기본 감정으로 분류되지 않고, 억울함, 무력감, 분노 등이 혼합된 복합 감정이란 점에서 그동안 “간과된 감정(forgotten emotion)”이라고 주장한다.

  왜 울분이 생기는가? 린든과 동료들은 울분을 스펙트럼으로 설명한다. 일시적인 울분이 있는 반면 다른 정신질환이 발현되면서 울분을 동반하는 2차적인 울분이 있고, 울분장애까지 다양한 유형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서독으로 이주한 구동독 주민 중에서 지속되는 울분과 침습적인 복수생각으로 사회적 역할과 기능 수행이 불가능해지고 자기나 주변을 파괴하는 정신질환에 해당하는 울분의 임상증례를 토대로 외상후울분장애(Post 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 PTED)라는 새로운 진단명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유형이든 울분은 ‘부당하고 정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일이 발생하여 사람의 기본 신념과 가치가 위협 받거나 붕괴하면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경험되는 감정’이란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지난 2018년에는 약 9개월간 다양한 학제의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인의 울분을 측정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현재 문헌에서는 일반 인구집단의 약 2-3% 정도가 ‘임상적으로도 유의미한 심각한 울분’일 것이라는 추정이 있었으나 우리의 조사 결과 응답자의 14.7%가 심각한 울분 상태로 나타났고, 만성적인 울분까지 포함하면 거의 50%의 응답자가 높은 울분 상태였다. 그 현황은 동일한 측정법으로 두 해 전에 실시된 조사 결과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즉, 울분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저한 감정이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그토록 놀라운 결과를 접한 대부분이 ‘그럴것같았다. 놀랄 일이 아니’라고 반응한 점이다. 우리가 만성적이고 심각한 수준의 울분 감정 속에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놀라운 결과에 놀라지 않는 것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까. 이대로 내일도 울분을 안고 살아가도 좋은가? 그동안 우리는 왜 울분이란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것일까?

  지난 해의 조사는 이런 의문에 도움이 될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일부를 요약하면, ‘내가 경험한 울분’의 경우 울분 유발 상황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몹시 정의에 어긋난다고 느끼게 하는 일”, “나를 불행하게 만 들고, 위축시키고, 무력하다고 느끼게 하는 일”등이 주를 이뤘다. 반면 ‘사회적 사안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울분’은 “공적 규칙 위반”과 “권한과 권력 남용”이 주된 유발 요인이었다. 이 외에 ‘울분’을 제목에 포함하는 지난 29년 동안의 7개 일간지 기사를 내용 분석해보기도 했다. 그 결과, 한국 사회의 울분은 ‘사건사고 피해로 무고한 시민이 사망, 질병, 경제적 삶의 기반 박탈을 경험하고 여기서 생기는 기본 권리의 요구가 묵살될 때 생기는 국가와 사회를 향한 분노’가 언론을 통해 가장 빈번히 등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기존 연구 결과와 일관되게 울분은 건강과 웰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울분이 심각한 집단은 반대 집단에 비해 부정적인 생애사건 경험이 많았고 공정함에 대한 신뢰 또한 유의하게 낮았다. 이들에게는 사회적 지지가 부족했고, 회복탄력성 점수가 낮았으며, 무엇보다 사회적 신뢰가 크게 낮았다. 특히나 한국인의 울분에는 ‘박탈’을 함축하는 ‘주관적 계층인식’이 독보적인 설명력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울분 연구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에 관해 몇 줄 추가하면서 글을 마쳐야겠다. 울분은 한국 사회가 왜 정의로워야 하는지, 왜 일상의 사회 관계에서 공정해야 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울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올바름, 사회의 공평함과 공정성의 회복과 강화다.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면 보통의 수많은 사람들이 울분 속에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없던 병이 생기고 있던 병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울분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는 아무리 분배 정책과 공적인 공정성 규칙을 공표해도 목표로 한 정책에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2019년 상반기 울분 콜로퀴엄 마지막 회차가 오는 6월 14일에 열린다. 행사를 안내하면서 [울분 연구, ‘다음’을 함께]란 제목으로 참석자들에게 온라인으로 의견을 구하고 있다. <서울대저널>에서 글을 요청 받을 때 일찌감치 마지막에 같은 말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노나 화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이미 알려진 이름, 병명, 판단 기준들이 있다. 울분이 그와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감정양식의 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울분은 그것이 사회적 부당함과 부정의에 상응하는 감정이란 점에서 강력한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건강이 누려야 할 권리이듯이, 우리의 건강한 감정생활은 하나의 권리요 사회와 국가를 향한 정당한 요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감정을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만드는 온갖 부정의와 불공정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슬기로운 감정생활”의 주인이 되자고, 이를 위해 다음에는 함께 울분을 다뤄보자고 권하고 또 초청하고 싶다.


유명순(보건대학원) 교수
유명순 교수는 2018년부터 서울대 내 연구진과 함께 통섭과 융합을 통해 울분 연구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