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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더 많은 총회가 필요하다
등록일 2019.06.11 11:12l최종 업데이트 2019.06.23 10:42l 김수환(경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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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가 끝났다. 5월 27일은 나에게 두번째 전체학생총회이자, 두번째 사회대 학생총회였다. 입학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어 우리 반 깃발을 따라 전체학생총회에 참여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2년만에 다시 만난 아크로폴리스는 또다시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왔고, 전의 총회와는 다른 고민과 생각이 머릿속으로 끼어들었다. 또 얼마 전엔 17학번 친구가 ‘어떻게 우리가 입학하고 나서 매년 총회가 있냐’는 자조 섞인 한탄을 하는 것을 들었다. 글쎄, 총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외려 우리에겐 더 많은 총회가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많은 이들이 ‘학생사회의 위기’를 입에 올리던 때가 있었다. IMF 이후 취업난이 심화되고, 학생사회를 하나로 묶어내던 정치 담론이 약화되고,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캠퍼스를 장악하고, 대학생이 소비주체로 재편되고 - 하여 학생들이 더 이상 학생회 깃발 아래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 ‘학생사회 위기론’의 골자다. ‘위기’는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학생들의 낮은 관심 속에 학생회 선거가 줄줄이 무산되고, ‘비상대책위원회’니 ‘연석회의’니 하는 임시기구가 일상화되었다. 학생회의 역할은 새터, 농활 등의 연례행사를 때맞춰 준비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그마저도 전에 비해 위상이 보잘 것 없이 규모가 작아졌다. 오늘날 많은 과/반 학생회장들의 임기 중 최대 임무는 차기 학생회장을 찾는 일 그 자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학생사회의 위기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학생사회의 위기’를 논하기 전에, ‘학생사회’라는 것이 지금 이곳에 존재하기는 하는지 되물어야 할 판국이다.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다’라는 표어는 잊을 만하면 학내 집회에서 등장하지만, 그전에 학생들은 과연 스스로를 ‘학생회의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물론 학생회칙 상 학생회의 회원은 학부생 전원이고, 1년에 한 번 대표자를 선출할 권리가 그들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몇몇 학생회 대표자와 집행부원을 제하면, 자신이 학생회 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느끼는 학생은 몇이나 될까? 2019년에 이르러 학생회, 혹은 학생사회라는 말은 소수의 학생회 간부들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작아지지는 않았나?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이렇듯 만연한 위기 속에서도 전체 학생회원의 10분의 1이 참석해야 개회하는 학생총회는 곧잘 성사되고는 한다. 올해 1학기만 해도 서어서문학과 A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인문대 학생총회가 성사되었고, 잇달아 5월 27일 전체학생총회와 사회대 학생총회가 같은 날 열렸다. 학교 밖으로 눈을 돌리면 더욱 경이롭다. 5월 한 달 동안에만 한신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국민대학교에서 수천수백의 학우들이 자리한 가운데 전체학생총회가 연달아 성사되었다. 물론 각 단위에서 총회를 준비하며 서로 논의가 오갔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서로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받았음은 분명해보인다. 마치 ‘학생사회’가 위기를 훌훌 털고 무덤에서 다시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마냥 보인다.

  마치 약속하기라도 한 듯 연이은 학생총회 성사의 흐름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각 캠퍼스의 상황에 따라 요구안의 내용은 상이했지만, 총회에 모인 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교육에 대해 더 많은 결정권을 갖기를 원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2019년의 대학생이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혹은 대학 정책에 대해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실상 아무것도 없다. 대학생의 앞날엔 대학원 진학, 고시 준비, 기업 취직이라는 몇 가지 선택지가 주어져있을 뿐,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가까스로 기회를 잡기 위해 무던히 학점과 스펙을 관리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수업 커리큘럼을 정하고 등록금 수준을 결정하고 교수를 임명하는 일은 오롯이 총장과 보직교수, 본부 직원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심지어는 학생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교수를 징계하는 절차에서마저 학생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학생들이 현실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다. 많은 학생들은 숨막히고 갑갑한 현실 속에서도 더 많은 가능성이 주어지길 기대하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행동에 나설 준비가 되어있다. 다만, 함께 행동할 만한 기회가 쉽사리 주어지지 않을 뿐이다. 내가 지금껏 총회 현장에서 확인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대학생을 향해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고, 자기자신밖에 모른다고 손가락질 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을 만들고 싶은 각자의 열망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있다는 것. 그들은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우리 대학생들은 성폭력 교수에 대한 정당한 징계를 요구하며, 민주적인 총장선출제도를 요구하며, 일방적인 대학 구조조정에 저항하며 각자의 현장에서 싸워왔다.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기를, 더 많은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학생총회는 이러한 학생들의 열망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뜨거운 민주주의의 장이다.

  학생회가 과거의 영광과 활력을 잃었을지는 모르지만, 잇따른 학생총회 성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해줄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학생회를 원하는 학생들이 있다. 학생 모두가 학생회의 구성원이라는 회칙 상의 구절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달성되어야 할 목표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학생총회는 학생회원 각자가 학생회의 활동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임을 확인하는 몇 안 되는 기회이다. 또한, 학우 일반이 동등한 권한을 갖고 논의에 참여하여 요구안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학생자치의 실현이다. 혹자는 총회가 지나치게 많이 열리면 총회의 정치적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러나 온전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대학에서 실현되지 않는 이상, 학생 전체가 참여하는 정치적 공론장의 필요성은 늘 존재한다. 우리에게 더 많은 총회가 필요한 이유다.

  광장에 모인 1800의 학우들 앞에서 ‘제동’이니 ‘촉진’이니 하는 구분은 의미를 상실했다. 한 현장발언자의 말처럼 총회에 모인 학생들은 대학 본부와 교수사회가 독점한 무소불위의 권력에 제동을 걸고, 이를 통해 민주적인 대학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촉진하기를 택했다. 총회라는 이름의 잔치는 끝났지만, 성폭력 가해 교수를 대학 밖으로 몰아내고 이 대학을 민주적으로 바꿔내기 위한 싸움이 우리 앞에 남아있다. 녹록지 않은 일이겠지만,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광장으로 향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열의와 현명을 믿는다. 무력감을 극복하고 하나되는 경험을 만들어낸 우리 스스로에게 박수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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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경제 17)
경제학부 17학번. 작년과 올해 두 번의 사회대 총회를 준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