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 > 기고·칼럼
인간답게 산다는 것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강시혁(의학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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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해보자. 국회의원들이 너무나도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건강은 걱정할 수조차 없다. 뭐 상상이나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너무 흥분하시지는 말기를. 병원을 찾는 일은 고사하고 변변한 건강진단조차 받기 힘든 국회의원들을 걱정된 정부에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일괄 건강진단을 실시하기로 했다. 검사 결과 국회의원 300명중에 60명이 만성위염 등 심각한 소화기계 질환을 가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5?18 전날 술집에서 여자 끼고 폭탄주를 퍼붓다가 생긴 위염은 빼고 말이다. 이 얼마나 박수칠 만한 일인가.

한 전 산업안전공단 산업보건연구원이 실시한 역학조사에서 인천지역 주물공장 노동자의 13.8%가 진폐와 관련된 건강이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타 폐결핵, 기관지염, 기관지 확장증 등의 호흡기 질환까지 포함하면 전체 검사자의 22.5%가 폐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30인 이상 사업장만을 대상으로 일부 공장을 조사한 결과이기 때문에 실제 사태는 더욱 심각할 수도 있다.
익히 알고 있는대로 진폐증은 폐에 미세한 입자가 침착되어 조직반응(섬유화)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가래를 뱉으면 시커먼 덩어리가 나올 정도로 심하게 먼지에 노출된 경우 이 입자들은 폐에 쌓이게 되고, 이로 인해 원래는 스폰지같던 폐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변해버린다. 이때 미세한 입자는 탄광의 석탄가루일 수도 있고 채석광의 돌가루일 수도 있다. 이들 주물공장에서는 고철을 녹이고 틀에 굳히는 동안 상당한 먼지가 발생한다고 한다.

산업재해니 직업병이니 하는 얘기를 많이 들어온 우리는 이런 일에 무감각해져버린 것 같다. 13%. 22%니 하는 수치에도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6만여 명에 이르는 진폐환자가 있다. 이 숫자가 부담이 되는지 노동부는 까다로운 조건을 갖춘 진폐환자만을 요양대상자로 취급해주고 있다. 폐암, 결핵, 폐기종, 기흉 등 8개 합병증 가운데 하나라도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놓고 산업화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햇살 뒤의 그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게다가 이미 인생 살만큼 산 산업화의 주역들, 적절하게 피해가면 될 문제 아닌가. 그러나 “500년만의 참사”라고들 떠들어대는 9?11테러 희생자가 수 천명 선인 것을 생각하면 6만 명은 너무 많은 사람이다. 산업화의 그늘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희생이다.
진폐증의 무서운 점은 이 질병이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의료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적절하게 보조호흡기를 대주고, 잊지 않고 진통제를 주며 때 되면 가래 빼주는 것이 고작이다. 과정을 늦추고 덜 고통답게 해주는 것뿐이다. 악성종양처럼 ‘기적의 약‘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저 날까지 "다 고쳐서 나가“ 진폐환자들 사이에서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는 날까지 욕보이지 않게 해주는 일이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왜 사람이 죽어나는 작업을 계속해야만 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라지만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욕망을 즐긴다는 사실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일까.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해보지만 어쨌든 현실은 현실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생산 현장에서는 부지기수의 노동자들이 진폐증의 위협 속에서 노동하고 있다. 그나마 이런 현실 속에서 불합리를 교정하는 최소한의 수단으로 우리 사회는 사회보장제도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독박쓰지 말자’는 것일진데, 위험 부담을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눠서 부담하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금도 걷고, 담배값도 올린다고 한다.

지난 4월 성모병원 진폐직업병센터 의료진들이 전원 사표를 제출했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 진폐 진료의 효시로, 40여년동안 진폐환자들을 치료해온 가톨릭의대 성모병원이 진폐병동을 폐쇄하기로 했다. 열악할 데 그지없는 진폐 관리 시스템 중에서 성모병원은 중증 진폐환자들을 진료하고 연구할 시설과 인력을 갖춘 거의 유일한 의료기관이다.
가장 큰 이유는 의료진의 부족이다. 병원 측은 보건복지부에 “2~3명의 공중보건의라도 보내준다면 병동 운영이 가능하다”고 호소했으나 복지부는 “서울의 대학병원이라 파견할 수 없다”는 공문 한 장만을 보낸 채 묵묵부답이라고 한다.
누구를 위한 사회보장인지 혼란스러워진다. X같은 현실에 어떤 욕지거리를 집어던져도 세상은 요동조차 않는다. 오늘도 산업현장에서는 속속 진폐환자가 발생한다. 그렇게나 많은 산업화의 눈물을 흘리고도 우리 사회는 그 모습 그대로 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