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호 > 기고·칼럼 >편집실에서
행복한 조연이 되겠습니다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편집장 정원일 (jwi82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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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대 총학선거가 막을 내렸다. ‘실천가능 2기’를 표방한 박진혁 씨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고, 서울대 안팎의 이목이 집중됐다. 견제와 감시는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당선을 축하드린다. 오랜만에 ‘논쟁’이 되살아난 선거였고, 도 선거뉴스 발행에서부터 실시간 개표보도에 이르기까지 총학선거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자 인생무상을 외치며 허무함을 호소하는 기자들이 있었으니, 이는 선거 후유증의 대표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 허무함의 정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누가 뭐래도 총학선거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쪽은 출마 선본들이다. 언론의 역할은 출마 선본들의 입장과 정책을 고루 전달하고, 유권자들에게 판단기준을 제시하는 것에 그친다. ‘주연’이 되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진대, 자꾸 주연을 부각시키는 존재감 없는 ‘조연’이 되라 하니 기자들도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지난 3년 동안 비슷한 경험을 무수히 반복했기에 기자들의 푸념이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았다. 조연은 잘 해 봐야 ‘주연급 조연’이 될 수 있을 뿐, 주인공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다.

의기소침한 생각들로 무기력해져 있을 무렵, 마감된 이번 호 원고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봤다. 높은 학자금대출 금리에 허덕이는 학생들, 단전의 공포에 떨며 겨울을 나는 사람들, 예배할 공간조차 허락받지 않은 서울대의 무슬림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서울대라는 공간 안에서 주연도 조연도 아닌 ‘불청객’ 취급을 받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무능하고 또 무능한 정부 아래에서, 아직도 두텁기만 한 유리천장 밑에서, 십년 치 봉급을 털어도 집 한 채 사기 어려운 팍팍한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는 불청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언론이 주연을 빛내는 조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 목소리를 낼 힘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이들에게 확성기를 쥐어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취재와 마감, 교열이 반복되는 지친 일상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의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 계기였다. 문전박대 당해왔던 불청객들도 주연이 돼 당당히 무대에 설 수 있는 날, 적어도 우리 모두가 자신의 잊혀진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조연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나갈 것이다. 서울대와 우리 사회의 그늘진 구석구석을 비추는 ‘행복한 조연’이 되겠다.

사실상 고별사를 쓰려다 보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지난 한 학기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난 호 기사 하나가 기성 언론 수십 곳에 인용되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그런가 하면 편집장의 덕이 부족한 탓인지 몰라도 석연찮은 이유로 ‘전부수 회수 요청’을 두 차례나 받아야 했다. 기자들 개개인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주기적으로 책을 찍어내는 작업을 총괄해야 하는 악역을 맡다 보니 언성을 드높인 일도 많았다. 천성이 고집불통이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소심한지라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사흘 밤낮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독자 여러분들이 보내 주신 성원이 큰 힘이 됐다. 여러 경로로 답지한 팬레터를 기자들 몰래 두고두고 꺼내 읽으며 혼자 흐뭇해했다. 어쩌고 보면, 편집장을 맡은 지난 한 학기 동안 이미 ‘행복한’ 조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