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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보지들, 모든 여자들의 이야기 연극 '보지 모놀로그'
등록일 2016.11.11 15:19l최종 업데이트 2016.11.17 16:28l 김세영 기자(birdyu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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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해 보세요, 보-지.” 캄캄한 소극장 안, 검은 옷을 입은 두 배우가 해맑은 미소와 함께 자신들을 따라 ‘보지’라고 말해보라고 한다. 열 명 남짓의 관객이 있지만, 따라하는 목소리는 역시나 신통치 못하다. 얼버무려지는 ‘그 단어’ 끝에 어색한 헛기침이 뒤따른다. 배우들은 한 번 더 요구한다. “잘했어요! 좀 더 크게 말해볼까요? 보-지.”

 

  이렇게 ‘보지’라고 말하는 통과의례를 거치면 본격적인 보지들의 이야기, ‘보지 모놀로그’가 시작된다. 보지 모놀로그는 백인 여자, 흑인 여자, 동양인 여자, 소녀, 할머니, 결국 모든 여자들의 보지가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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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보지 모놀로그' 포스터 ⓒ연극 '보지 모놀로그' 



  두 배우는 남편에게 보지 털이 밀린 아내가 됐다가, 부끄럼 많은 할머니가 됐다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된다. 보지들은 어린 아이처럼 털이 밀리거나, ‘홍수’가 났다고 구 박받거나, 낯선 땅에 끌려가 하루에만 20명 의 일본군을 받아내야 했다. 사연 속의 보지 들은 모두 어두운 지하실에 꽁꽁 숨어있고 외부로부터 공격 받는다. 이름 없는 보지들, 말하지 못한 여자들은 아직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이렇게 보지가 억압받는 세상에서 연극은 끊임없이 보지를 말하고 상상한다. ‘보지의 냄새는?’, ‘보지의 생김새는?’, ‘보지가 옷을 입는다면?’, ‘보지가 말을 한다면?’ 보지는 새로운 상상력의 창구다. 보지에서는 ‘꽃’, ‘낡은 가구’, ‘생선과 라일락 사이 어디쯤’, 급기야는 ‘하느님’ 냄새가 난다. 처음으로 관찰하고 그려보는 보지는 꽃잎이 되기도 하고, 예쁜 접시가 되기도 하고, 원자들에 둘러싸인 블랙홀이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 배우들은 보지 그 자체가 되어 말한다. “천천히!” “심심해!” “나 여기 있어!” “나 잊어버린 거 아니지?”

 

  배우들은 관객석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앉아 보지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모습은 그저 솔직할 뿐 전혀 외설적이지 않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보지들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난생 처음으로 ‘보지’라고 말해본 후 비로소 인지하게 된 보지의 존재, 등을 바닥에 대고 드러누워 손거울에 비친 보지를 관찰하고서 처음으로 느낀 오르가즘, 출산할 때 벌어지고 찢기고 피 흘리던 보지의 모습. 감각으로 다가오는 보지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못했나’ 의아할 정도다. 


  사실 연극 ‘보지 모놀로그’는 그 역사가 깊다. 1996년 미국의 극작가 이브 엔슬러 (Eve Ensler)는 200여 명의 여성을 인터뷰한 후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를 만들었다. 연극에는 성폭력, 오르가즘, 출산 등 여성이 겪는 모든 상황들이담겼다. 금기시된 주제였던 여성의 성기, 보지를 소재로 한 이 연극은 이후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 상연됐다. 한국에서는 2001 년 초연됐고, 2006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도 포함됐다. 


  보지들의 이야기는 결국 여자들의 이야기다. 온전히 보지들이 말하는 1시간 30분은 관객들에게 짜릿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보지들의 이야기’라는 연극이 상연되는 상황은 한편으로 여전히 여자들이 성(性)에 대해 이야기하기 힘든 현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아직도 보지는 극장 안에서만 이야기된다. 보지가 ‘아래’, ‘그거’, ‘구멍’이 아닌 ‘보지’라고 불릴 수 있는 그날까지 연극 ‘보지 모놀로그’는 분명 계속될 것이고,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