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호 > 기고·칼럼 >데스크칼럼
사랑의 시선이 향하는 곳
등록일 2016.11.12 13:38l최종 업데이트 2016.11.17 16:31l 김세영 문화학술부장(birdyung@snu.ac.kr)

조회 수:332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뜻이다. 사랑의 대상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김연수는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사랑의 시선이 처음 향하는 곳은 자기 자신이다. 사랑의 황홀함이든 이별의 아픔이든 그것을 느끼는 것은 온전히 나 자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에는 그것을 겪는 주체, ‘나’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알지 못했던 나의 세계를 개방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랑지상주의가 아닌 연애지상주의 사회를 산다. 연애마저 능력과 스펙으로 치환되는 사회에서, 정작 사랑은 없다고들 말한다. 누군가는 ‘사랑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사랑이 불가능한 사회다. 다시 소설 속 문장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사랑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것은 사실 도무지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사회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랑은 필연적이다. 나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들을 모두 벗어던진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야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마주했을 때, 연애지상주의 사회의 우리는 스스로를 들여다보기보다는 간편하게 타인에게로 그 시선을 돌려버린다. 따라서 나를 사랑하기 위한 선행 조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밖으로 향한다.
 
  나를 알기 위해 외부의 판단에 의존하는 만큼,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검열하는 사회의 기준에 너무도 관대하다. 사랑의 조건과 시기를 결정하는 사회의 기준들은 거리낌 없이 자기검열의 도구가 된다. 사랑이 없어졌다는 사회에서, 사랑은 너무도 강력하게 우리의 자존감을 결정한다. 강요된 초조함 속에서 사람들은 마치 임무를 수행하듯 사랑을 찾아 나선다. ‘맞춤형 짝’을 찾아주겠다는 결혼정보회사 광고가 즐비한 현대사회의 모습은,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해버리는 영화 ‘더 랍스터’ 속 디스토피아와 닮아있다. 주어진 시일 내에 사랑을 시작해야만 하는 이들이 찾아나서는 ‘짝’이 언제나 나와 공통점을 가진 ‘동류의 인간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때 사랑이란 작업은 새로운 나의 세계를 개방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세계를 늘려 확장하는 자기만족이고 자기위안일 뿐이다.

  이런 사회에서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경유하는 사랑은, 새로운 나를 창조하는 사랑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이번 호의 커버스토리 ‘온 우주가 내 연애걱정’은 사회가 정한 사랑의 기준을 내면화한 우리 모습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사회가 말하는 사랑에 덜 민감해지고, 나 자신에게 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지극히 사회적인 사랑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나에 대한 사랑을 복원하고 타인에 대한 사랑 역시도 복원할 수 있다.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나를 돌아보고, 그것이 또 사랑의 시작이 되는 그런 살아있음이 사랑의 공간이 갖는 고유한 특성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