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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시대를 밝힌 한줄기 빛, 김세진 열사를 기억하다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숭고한 항거
등록일 2016.11.11 10:09l최종 업데이트 2016.12.05 15:22l 박주평 기자(pjppjp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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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24일 호암교수회관에서는 김세진·이재호 열사 분신 30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을 주관한 ‘김세진·이재호 기념사업회’는 30주년 기념사업으로 두 열사의 분신이 있었던 86년 전후의 자료를 디지털로 남기는 ‘김세진·이재호 기억저장소(snu.osaf.net)’를 구축하고 있다. ‘김세진·이재호 기념사업회’ 유재석(지질학과·졸업) 운영위원은 “김세진·이재호 열사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그 투쟁의 뜻을 오늘에 되살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함께 하고자 하는 바람”이라며 사업의 취지를 밝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며 폭력의 시대가 몰고 온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된 청년, 김세진 열사의 삶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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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세진 열사 부모님 제공


예수의 길을 따라 걷고자 했던 청년


  김세진 열사는 1965년 2월 20일 충북 충주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나 온 가족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1971년에는 열사의 아버지 김재훈 씨가 서울로 일터를 옮기면서 가족들도 함께 서울 효자동에 터를 잡았다. 아버지 김재훈 씨에게 열사는 “유독 잘생기고 운동 빼고는 만능”인 아들이었다. 특히 김세진 열사는 음악에 소질이 있어 피아노와 기타를 잘 다뤘고, 고등학교 때는 그룹사운드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공부는 항상 1등을 도맡았고, 고등학교 3년 내내 반장을 할 정도로 리더십도 강했다.

  열사는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성격이었다. 김재훈 씨는 열사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국민윤리 시간에 선생님이 운동권 학생을 비방하는 말을 했는데, 세진이 형이 운동을 했으니까 그게 자기 형 이야기거든. 그래서 질문 있다고 손을 들더니 ‘형들이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선생님은 무얼 했습니까? 대답해주십쇼’ 이러니까 선생님이 얼굴이 빨개져가지고 10분 동안 파랗게 있더니 나가버리더래.”

  열사는 또한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성격은 생활습관에서도 드러났다. 어머니 김순정 씨는 열사의 방은 항상 흐트러짐 없이 깨끗했고, 발이 오목해서 맞춰 신은 구두 역시 언제나 광이 났다고 기억한다. 또한 김재훈 씨는 열사가 스스로를 칸트라고 불렀을 만큼 시간관념이 철저했다고 회상했다. 열사는 타인에게 엄격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었다.

  김세진 열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의 독실한 신앙은 열사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모태신앙이었던 열사는 서울로 상경한 뒤 종로구에 있는 ‘자교교회’에 다니며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 소식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어느 날 인간의 외침 속에서 빛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 희미하고 불확실한 음성이 아닌 강하고 확실한 음성으로 그는 확실한 변화와 완전한 내어맡김을 원했다. 오늘도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 그 목소리.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神. (중략) 나는 그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전할 수밖에없다. 그만이 나의 존재에 의미와 가치를 주기에 그만이 나의 삶에 목적과 방향을 주기에, 그만이 나에게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해답을 줄 수 있기에 

  김세진 열사의 가슴 밑바닥에는 언제나 예수의 사랑이 있었다. 열사는 단지 예수를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와 닮고자 했다. 그는 1983년 미생물학과에 입학한 뒤 교회 대학생부에서 활동하며 여름 수련회 대신 농촌활동을 할 것을 제안했다.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사는 ‘굶고 헐벗는 사람들을 내 몸으로 느끼지 않고 입으로 만,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안 된다. 학교만 다니며 부모의 고통도 모르는데 남의 고통을 어떻게 알겠냐’며 이웃과 함께할 것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뜻을 관철시켰다.


오직 민중을 위하여 투쟁, 투쟁, 투쟁

  열사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3년은 전두환 정권이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하고 유화국면을 조성하기 직전이었다.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형 김갑진 씨의 영향으로 일찍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던 김세진 열사는 신입생 시절 문무대에서 군사독재정권의 잔혹한 폭력을 경험했다. 당시 전국의 대학 신입생들은 문무대에 입소해 화생방, 유격훈련 등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입학 직후부터 노래패 ‘메아리’에서 활동하던 열사는 민중가요가 수록된 노래집을 가지고 입소했다. 이 때문에 그는 별도로 가혹한 훈련을 받아야 했고, 퇴소 후 1주일을 앓아누웠다. 열사는 2학년 때 미생물학과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문무대와 4월에 나에게 가해졌던 정신적인 고통에 대해 (중략)난 비바람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 바로 그 당사자였으니까. 그 고통을 통해 내가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이 드오’라며 야만과 폭력을 몸소 느낀 소회를 전했다. 막연히 머리로만 알던 시대의 어둠과 마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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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5일 열린 김세진 열사의 장례식에 4천여 명이 모여 아크로 폴리스를 가득 채웠다. 사진=김세진 열사 부모님 제공


  서클 동기였던 장우혁(물리학과·졸업) 씨는 “(당시에는) 모든 집회, 심지어 과 총회조차도 허용되지 않고 사복경찰이 학교에 상주했다”고 증언했다. 장 씨는 학생들이 운동에 투신한 가장 큰 이유는 “광주에서 잔혹한 살상을 저지른 전두환 정권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이었다”고 말했다. 김세진 열사는 부모님께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저의 대학 생활은 인간의 해방과 민중의 그리고 민족의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고민의 과정이었으며 그것의 쟁취를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습니다. 광주에서의 2천 명의 학살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장우혁 씨에 의하면 당시 자연대는 과학도로서 가치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과 교수들의 비관용적인 태도 때문에 학생운동 참여가 활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세진 열사는 누구보다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다. 3학년때 미생물학과 학생회장 및 자연대 부학생회장을 역임하며 공개적인 활동에 나섰고, 이듬해에는 자연대 학생회장에 당선돼 운동을 주도했다. 장 씨는 열사가 “원칙주의자로서 자기주관이 강해 후배들에겐 무서운 선배일 수 있었다”면서도 “상황을 분석하는 힘이 있고 솔선수범해서 조직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한 학번 후배로 열사와 함께 서클활동을 했던 이영득(동물학과·졸업) 씨는 김세진 열사를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항상 진지했고 날카로웠던 선배”로 기억했다. 또한 이 씨는 “오로지 혁명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철저한 삶의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원칙주의자로서 열사의 진지한 태도는 1985년 등록금 동결투쟁에서도 드러났다. 열사는 성적장학생이었기에 학도호국단비 5천 원만 납부하면 됐다. 그럼에도 열사는 끝까지 등록을 거부한 마지막 두 명 중 하나였다. 결국 아버지 김재훈 씨가 왜 등록을 안 하냐는 학교 측의 전화를 받고 나서 등록을 한 뒤에야 열사는 겨우겨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바보도 아니고 다들 등록하는 것을 왜 너만 안 하냐”는 김 씨의 물음에 열사는 싱긋 웃더니 “약속했으니까요”라고 답했다. 김세진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는 바보 같을지라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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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학생회관에서 ‘김세진·이재호열사 3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서울대저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1985년 5월에 있었던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 때만 해도 서울대 학생 운동권은 국민정서를 고려해 자신들의 노선이 반미가 아님을 강변하고 반정부 투쟁에 집중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며 전두환 독재정권을 둘러싼 미국의 역할에 대한 운동권의 견해가 나뉘었고, 운동진영은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와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로 분열했다. 반파쇼 투쟁을 학생운동의 우선과제로 설정한 민민투와는 달리, 자민투는 군사정권을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한반도에 세운 괴뢰정권으로 인식했고, 반제국주의투쟁 없이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86년 4월 초, 자민투와 서울대 총학생회는 성균관대학교 2학년들이 벌인 전방입소거부투쟁에 호응해 서울대 85학번들의 전방입소거부투쟁을 결의했다. 당시 대학교 2학년들은 최전방 부대에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자민투와 총학생회는 이를 미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용병교육으로 인식한 것이다. 김지용(국제경제학과·졸업) 총학생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방입소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특별위원회)’가 투쟁의 주체가 됐다. 당시 자연대 학생회장이었던 김세진 열사는 수배 상태에서 단대학생회장모임의 대표로 총학생회 차원의 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점차 달아오른 열기에 힘입어 특별위원회는 4월 28일부터 4일간 중앙도서관 농성계획을 세웠으나 26일부터 28일까지 본부의 휴관조치로 무산됐다. 대안으로 27일 오전 연건캠퍼스 도서관에서의 농성이 준비됐지만 사전에 정보가 누출돼 도서관 진입을 시도한 10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됐다. 농성의 지도부였던 김세진·이재호(정치학과·명예졸업) 열사는 큰 책임을 느꼈다. 특별위원회는 기나긴 논의 끝에 전방입소 당일이었던 28일 오전 9시, 신림사거리를 투쟁장소로 정하고 연좌농성을 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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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 열사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과 굳센 신념을 마지막 편지에 담았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


  신림사거리에는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입소대상인 4백여 명의 85학번들이 신림사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으로 모였다. 두 열사는 옥상에서 “양키의 용병교육전방입소 결사반대” 구호를 선창하며 투쟁을 이끌었다.

  곧 경찰들이 출동해 농성을 진압했고 일부 경찰들은 건물옥상으로 올라갔다. 김세진·이재호 열사는 미리 준비한 시너를 온몸에 끼얹으며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가까이 오면 분신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결국 비극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김세진 열사는 끝끝내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며 희생한 것일까. 장우혁 씨는 열사의 분신이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장 씨는 당시 학생 운동권에 “싸우다가 총 맞아 죽으면 어쩔 수 없지만, 목숨을 희생해서 이 국면을 돌파하겠다는 인식은 없었다”며 “최소한 세진이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위를 앞두고 열사는 자신이 구속될 것이라 예상하고 부모님에게 당부의 말을 편지로 남겼다.

  돌이켜보면 아주 피곤하고 힘들고 바쁘게 보낸 3년 2개월여의 대학생활이었지만 저는 저의 기득권이 포기되고 구속이 되더라도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이 땅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교도소 안에서도 고민하고 나와서도 변혁해방운동에 이 몸을 바칠 것입니다. (중략)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해방된 조국의 땅에서 자랑스러운 아들임을 뿌듯하게 느낄 때가 반드시 올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투쟁 속에서 그날을 앞당기겠습니다.

  장우혁 씨는 그 동안 김세진 열사와 관련된 모든 인터뷰나 기고를 거부했었다. 그는 “‘김세진 열사’가 입에 붙지 않는다”며 후일담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세진이가 반미열사로 우뚝 서기보다 아직 곁에 있어 지금도 술 먹고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다만 아직 민주화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하게 민주주의를 고민했던 인간”을 기억할 필요가 있기에 인터뷰에 응했다고 밝혔다.

  김재훈 씨와 김순정 씨는 열사가 분신한 뒤 열사를 천하의 불효자식이라고 원망했다. 열사가 마지막으로 집에 들른 것은 1985년 11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김세진 열사는 학교 측으로부터 전액 장학금 조건의 미국 유학을 제안 받은 상황이었다. 열사는 유학을 가겠다는 대답 대신 노동운동에 투신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머니는 “내가 너한테 빈다. 무사히 졸업만 해라”라며 아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 자식만 잘 되기를 바랍니까? 예수님한테 그렇게 배웠습니까?” 열사의 대답이었다.

  10년 전 김재훈 씨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그날 이후 세진이를 이해하기 위해 싸워온 것 같아’라고 말했다. 이제 김 씨는 열사가 자신에게는 과분한 아들이었으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부모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린 것이기에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열사가 떠나고 난 뒤 김 씨는 아들의 자취방을 찾았다. 열사의 책상을 덮은 유리 밑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적힌 손바닥만한 종이가 있었다. 때 묻은 현실에서 숭고한 결백을 노래한 시인을 동경했기 때문일까, 김세진 열사는 죽어서도 꺼지지 않는 신화가 됐다. 짧은 생애였지만 김세진 열사는 그가 어느 편지글에 남겼던 성경의 한 구절을 몸으로 살아냈기에 살았을 적 행복한 사람이었다. ‘여러분에게 어떤 신념이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각각 그 신념대로 살아가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로마서 14:22) 


  기사에 인용된 김세진 열사의 글은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분신 20주년을 맞아 간행된 추모문집 《아름다운 청년 김세진·이재호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615연석회의에서 '4월 24일 호암교수회관에서 ‘김세진·이재호열사 30주기 추모제’이 열렸다는 내용에 오류가 있으며, 4월 28일 학생회관에서 열린 학생 주최 행사임을 알려왔습니다. 이에 수정합니다. 잘못된 보도로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