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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콜라의 무지카: 학생사회와 꿈에 관하여
등록일 2016.11.11 12:58l최종 업데이트 2016.11.17 16:30l 김세철(미학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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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 무지카(Musica)

  여름 내내 브라질을 생각했다. 에어컨과 숲의 초록마저 소용없는 더위 앞에서 나는 지구 반대편 브라질을 떠올렸다. 그건 올림픽의 불꽃 때문도, 그 뒤로 얼룩진 추문과 곤궁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음악 때문이었다. 하필 애플의 음원 서비스가 한국에 들어왔고 하필 평소 듣던 음악들이 저작권 문제로 빠졌으며 하필 브라질 음악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세 번의 ‘하필’이 겹쳐 브라질에 닿았다. 오직 노래로만, LP로 CD로 납작해지다 못해 몇 메가바이트의 파형으로 줄어든 음원으로만 브라질을 상상했다. 천진하게 아름다운 브라질을, 브라질 사람에게도 허락되지 않아 노래로만 살아 본 꿈의 브라질을. 

  세 대륙이 섞인 음악이라고 했다. 남미 대륙에 서유럽의 궁정음악이 흘러와 쇼루(Choro) 음악이 되었다고, 그 위에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인의 리듬이 얹혀 삼바가 되었다고 했다. 침략의 역사가 멋대로 섞여 빚은 아름다움이었다. 소리를 좀 덜면 보사노바가 되었고 록과 팝이 섞이면 브라질 가요(MPB)가 되었다. 좋은 것들이 끝 모르게 이어졌다. 이 좋은 걸 손안에 다 쥘 수 없어 힘들었지만 이 좋은 게 영영 모자라지 않으리라 생각하면 힘이 났다. 

  이상했다. 한 나라에 훌륭한 음악가가 이렇게 많이 태어나다니. 그들이 죄다 이토록 부지런하다니. 땅이 커서인지 피가 남달라서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그곳에선 누구도 혼자가 아니었다. 하도 집 밖을 나오지 않아 그 유명한 보사노바 리듬조차 욕실에서 만들었다는 조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마저 혼자가 아니었다. 보사노바를 함께 완성한 조빙(Antônio Carlos Jobim)이 있었고 그에게 존경을 바친 벨로주(Caetano Veloso)가 있었다. 이들은 고독한 천재로 남는 대신 함께 노래했다. 반짝이는 순간을 역사 속에 함께 새겨 넣었다. 조앙과 조빙, 미국의 스탄 게츠(Stan Getz)까지 모여 만든 음반은 보사노바를 상징하는 단 한 장의 음반이 되었고, 벨로주와 그의 친구들은 트로피칼리아(Tropicália)라는 이름을 걸고 독재 정권에 맞섰다. 브라질은 혈연과 혼인으로, 존경과 우정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별자리였다. 별들은 검고 빛나는 우주를 배경으로만 태어나고 빛났다. 


쇠락

  언젠가부터 공동체는 쇠락으로만 그려졌다. 먹고 사는 일이 문제가 될 때마다 사람들은 공동체에 등을 돌렸다. 학생사회라는 이름도 그렇게 쪼그라들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좋았다. 아름답고 돈 안 되는 것들, 망한 예쁜 것들에 삶을 거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옳은 미래에 대한 꿈을 여럿이 나눌 때만 찾아드는 이상한 기분이 좋았다. 운동권이 아니면서도 학생사회를 말하고 지키려던 사람들은 대개 그런 취향으로 존재했다. 

  그러니 이곳이 당장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함께의 순간을 사랑하는 부류는 쉽사리 멸종하지 않으니까. 요새 젊은것들 개념 없다던 조상들은 천 년 전에도 있었고, 자기 세대가 끝물이라던 운동권 선배들은 십 년 전에도 있었지만, 올해 시월에도 총회가 열렸으니까. 조선일보는 이 모든 일이 운동권 단체 하나의 농간인 양 썼고, 학생들을 사찰한 대학 본부도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틀렸다. 운동권의 선동은 매번 있었고, 그러니 하필 지금에야 총회가 성사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거기 이천 명이 있었다. 중앙도서관과 행정관 사이에, 고목만이 서 있던 아크로폴리스에, 검은 바다 같던 어둠을 메운 이천의 몸이 있었다. 찬바람을 견디는 손들, 톱으로 문을 부수고 건물을 차지하는 일마저 틀리지 않았다고 응원하는 입술들이 있었다. 

  진정 쇠락하는 건 차라리 쇠락을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차라리 나였다. 사회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 있던 나는 사회와 멀어졌다. 총회와 점거가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총장실 진입에 성공하자마자 건물을 빠져나와 녹두호프에서 술을 마셨다. 자주 행정관에 갔지만, 그때마다 주인이 아닌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4년 남짓 머물렀으면 떠나야 하니까. 좋든 싫든 나가야 하니까. 그래서 총회가 5년마다 성사되는 거라고 농담을 했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학생사회와 멀어졌다. 곧 사라질 것에 마음을 쏟는 짝사랑은 결국 식기 마련이니까. 


이스콜라의 꿈

  학생사회 밖에서 사회적인 삶을 새로 꾸리려 했다. 혼자라도 집회에 자주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집회 안에서 시간과 기력을 쓰다 보면 함께의 감각도 새겨질 것 같았다. 그러나 집회에서조차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집회, 함께 들 깃발이 없는 집회를 견디기 힘들어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산산이 흩어진 아톰화된 개인이 데모에 오는 일은 없”었다. 나는 ‘나’가 아닌 ‘우리’로서만 집회에 갔다. 집회 안에서 사회를 말하기 위해선 그보다 작은 ‘우리’부터 가져야 했다. 

  브라질에는 그런 ‘우리’가 있었다. 최대의 삼바 행사인 카니발의 참가자들은 개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스콜라 지 삼바(Escola de Samba), 삼바 학교로서 카니발에 참가했다. 이름은 학교지만 실은 삼바 클럽의 별명이었던 이스콜라 안에서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노래했다. 저마다 직업을 가진 생활인들이 가끔 모여 멜로디를 만들고 가사를 입혔다. 치열하게 연습할 필요도, 거장이 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좋아하는 걸 나누기만 하면 되었다. 같은 꿈을 나누기만 하면 되었다. 이스콜라의 꿈이 검은 하늘에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 그때가 바로 카니발이었다. 카니발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소박하게 즐거운 삼바만큼은 언제든 흘러나왔으니까.
 
  이스콜라라니. 학교라니. 직장을 얻기 위해 잠깐 머물다 가는 학교에서 사회의 꿈을 나누라니. 헛된 소망임을 안다. 5년에 한 번 꼴인 점거를 빼면 대체로 초라했던 이곳의 역사도 기억한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다. 가진 꿈이 먹고 사는 것 하나인 삶은 좀 앙상하니까. 가진 공동체가 카카오톡 단체채팅방, 인터넷 게시판뿐인 삶은 사회를 품기에는 좁고 무력하니까. 장터와 학회와 총회에서 같이 마시고 읽고 싸우고 노래할 때, 우리는 다른 종류의 꿈도 품을 수 있으니까. 더 많은 꿈을 가지면 더 많은 미래를 갖게 되고, 그런 미래를 위해 분투하는 지금을 더 많이 갖게 될 테니까. 나중에 학교를 떠나게 되어도 같이 집회 갈 친구 하나쯤은 갖게 될 테니까. 아니, 무엇보다도 집회에 가는 나를 갖게 될 테니까. 

  학생사회는 나약한 단어다. 학생사회라는 게 지금 있기는 한 걸까. 이미 사라진 건 아닐까.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닐까. 학생회 근처 몇몇 활동가 조직을 묶은 네트워크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 운동권 몇몇의 생각을 모두의 뜻으로 뻥튀기하려는 가짜 개념은 아니었을까. 질문이 꼬리를 문다. 현실을 포착하기 위한 개념으로서는 이미 실패다. 그러나 학생사회라는 낱말은 여태 살아남았다. 이번에도 총회와 점거를 배회했다. 현실이 아닌 꿈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모여 함께의 순간을 나누겠다는 이념만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단어를 지지한다. 당장 내가 그 꿈속에서 자랐으니까. 그 안에서 ‘우리’를 배웠으니까. 그때 들은 노래가 귀에 남아 여태 흥얼거리고 있으니까. 꿈이 노래로 전염되는 곳이니까. 같은 이유로 총회와 점거를 지지한다. 싸움의 당위와 전략에 이견이 있더라도, 우리를 꿈꾸는 일만은 외면할 수 없으니까. 

  꿈이 공상에 그치지 않으려면 함께 꿔야 한다. 가능한 한 여럿이서, 가능한 한 생생하게. 그래서 제안한다. 이 꿈을 함께 꾸자고. 우리도 이스콜라의 무지카를 함께 부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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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철(미학 11) 

2012년 폐간한 자치언론 포트레이츠(Portraits)의 편집장을 맡았다. 대중음악 웹진 웨이브(weiv)의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두 번의 본부 점거에 참여했다. 읽고 듣고 쓰는 일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