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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를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 보려고 했던 삶, 이재유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정수양 기자 (conan57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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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소개할 인물인 이재유는 1930년대 국내 공산주의 운동가 중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는 소련이나 중국에 의존하지 않은 국내파 혁명가였으며,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대중주의적인 운동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나서 수차례 탈출하고 비밀 활동을 했던 활동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재유'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재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인물일까. 이번 기사에선 이재유의 활동 과정과 그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들을 돌아보도록 하자.

출생 그리고 일본 생활

이재유는 1905년에 함경북도 삼수에서 태어났다. 공부가 더 하고 싶었던 이재유는 1920년 아버지가 친척에게 갚고 오라고 준 돈을 가지고 무작정 상경한다. 이재유는 학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을 시작해야 했다. 1926년 개성의 송도고보에 입학했지만 1926년 11월 사회주의를 공부하는 모임을 조직해서 동맹휴학을 주동했다가 퇴학을 당하게 된다.
퇴학 후 얼마 되지 않아 1927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재유는 일본에서 여러 단체에서 주최하는 활동을 참가한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인간적 신뢰를 얻은 이재유는 '신간회' 동경지회 위원, '동경조선노동조합'의 중요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또, 비밀조직운동도 참가하게 되는데, 1928년 네번째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될 때 일본총국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고려공산청년회' 일본 총국 선전부장을 맡는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대대적으로 '고려공산청년회' 검거를 실시하면서 이재유도 검거된다. 경성으로 압송된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게 된다.

'경성트로이카'의 결성

경성트로이카의 일원들. 큰 사진 이재유, 시계방향으로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이재유 그룹은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렸다. '경성'은 경성지역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이고, ‘트로이카’는 조직 방식 중의 하나다. ‘트로이카 운동'이란 모든 활동가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자신과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고 따르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이재유가 이러한 조직방식을 채택하였던 것은 각 성원들의 자발성과 자주성을 충분히 보장하고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32년 12월 만기 출옥한 이재유는 이인행의 집에서 머물면서 많은 운동가들을 만난다. 그들은 당시 정세 판단과 운동 방침의 수립에 몰두하였고, 김삼룡, 이성출, 변홍대, 안병춘 등을 현장으로 투입시킨다. 그들은 현장에서 활발하게 조직 활동을 전개해 나갔고, 이런 실천적 성과는 1933년 9월 이재유를 중심으로 하는 ‘경성트로이카’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섬유, 화학, 금속의 주요공장에 투입된 이재유 그룹의 주요 활동가들은 대중의 불만과 분노를 파업으로, 나아가 지역의 연대파업으로까지 이끌며 맹렬한 활동을 개시했다. 1933년 하반기에 편창제사, 중앙상공회사, 소화제사, 고려 및 동명고무회사, 조선견직, 서울고무, 종연방적, 경성제사,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등 서울의 주요 공장에서 연쇄 파업이 격발됐다.
1933년 하반기 파업투쟁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경성트로이카에 대한 강력한 탄압과 검거에 돌입하였는데, 이현상, 안병춘을 포함하여 1차 경성트로이카 사건에서 검거된 관련자만 무려 200여명에 이르렀다. 이재유 역시 1934년 1월 체포됨으로써 경성트로이카 운동은 사실상 종결됐다.

'경성재건그룹' 시기

경찰은 이재유가 국제선과 연락하여 전국 조직을 결성하려 했다는 혐의를 두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온갖 악랄한 고문을 자행했다. 1934년 3월 어느날, 이재유는 취조로 인해 피곤해서 졸고있던 간수의 틈을 타서 1차 탈옥을 감행했지만 실패한다. 더욱 철저해진 보안에도 불구하고 이재유는 2번째 탈옥을 시도한다. 갖은 고문으로 인해 몸이 성치 않았던 이재유는 재치있게 경찰을 따돌린다.
그렇다면 이재유는 어디에 피신해 있었을까? 그는 동경제대 미야케 교수의 집 아래 토굴을 파고 한달 정도 숨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의 집요한 수사 끝에 1934년 5월 17일 정태식이 검거된 것을 시작으로 권영태 등이 검거되면서 이재유를 피신시켜준 미야께 교수도 21일에 검거된다. 미야께 교수는 ‘취조를 하루만 연기해주면 정신을 수습하여 자백서를 쓰겠다’고 간청을 하고 다음 날인 22일 비로소 탈출한 이재유가 자기 집에 있다는 사실을 진술한다. 그러나 이재유는 이미 미야께 교수의 관사를 탈출하고, 도로공사 인부로 생활하며 동지들과의 선을 대기 위해 노력했다.
1934년 8월부터 이재유는 트로이카그룹에서 학생부문을 담당했던 박진홍과 신당동 아지트에서 동거하면서 박진홍을 통해 동료들과의 연락을 재개하는 한편 이관술, 박영출 등과 운동방침을 수립해나갔다. 같은 해 10월 경찰은 이재유가 서울에서 일련의 운동을 지도하고 있다는 단서를 잡고 공성회 등 다수의 운동가들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조직과 운동을 사수했다. 검거의 시기를 놓친 경찰은 관계자 전원을 일단 석방해서 활동시켜 놓고 그 뒤를 추적하여 이재유를 유인, 체포하자는 전략을 세운다.
마침내 1935년 1월 4일 이인행이 이재유와 비밀 연락을 취하다 검거됐으며 열흘 뒤 동료를 만나러간 박진홍이 예정 시간이 되어도 아지트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재유는 즉시 박영출의 아지트에서 이관술, 박영출과 사태를 의논한 후 박영출이 박진홍이 실제 검거됐는지 확인한 후 대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신당동 아지트로 간 박영출은 그곳에서 잠복 중인 경찰에 체포됐다. 박영출은 어떠한 고문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또 당시 이재유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박진홍은 가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이재유를 도망시키기 위해 며칠동안 그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이 해 여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산했다.

'경성재건그룹' 그리고 마지막 체포

이재유를 체포한 기사를 내보낸 「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

이관술과 함께 박영출의 아지트를 빠져나온 이재유는 병으로 누워있던 유순희를 구출해서 도주, 잠적했다. 이재유와 이관술은 농부로 변장하여 중랑천 제방에 팸플릿 등 비밀서류 일체를 묻었다. 이들은 삼각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당시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지금의 도봉구 창동)에 수재민으로 가장해 정착한다.
당시 일제는 이재유를 잡기 위해 경찰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삼엄한 경계를 서울 전역에서 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서울 출입이나 동료들과의 연락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이재유는 당 재건 운동을 위한 활동방침을 새롭게 모색한다. 즉 이재유와 이관술은 정치 신문이나 출판물의 발행, 중심적 활동가를 통한 활동의 협의, 중심적 활동가에 대한 운동자금의 제공 등을 주요 임무로 맡고 중심적 활동가들은 공장 내에서 직접적 활동, 정치 신문이나 팸플릿의 배포 및 이를 통한 운동가의 확보 등을 주요 임무로 맡는 등 변화된 조건에 맞는 새로운 활동방침을 채택했다.
우선 중심적 활동가를 확보하기 위해 이재유는 박영출이 체포된 후 도주한 이종희의 오빠 이종국과 접촉하여 변우식, 서구원, 최호극 등을 만나고 이들과 운동의 일반방침에 관해 뜻을 같이 한 후 경성콤그룹의 후신인 김희성그룹의 일부 성원을 흡수, 통합하여 조직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전국 차원의 당 재건을 위해 우선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지방협의회’라는 통일 기관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통일 제안이 결렬됨에 따라 이재유는 경성재건그룹과 트로이카그룹의 2개 노선을 합하여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그간 여러 사정으로 미뤄져왔던 전국적 정치신문인 ‘적기’ 1~3호를 1936년 10월부터 12월까지 발행했다. ‘적기’를 통해 이재유는 당시 노동자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재유가 내세웠던 목표는 그가 1936년 12월 25일 체포됨으로서 실현되지 못했다.
체포된 후 약 4개월간 고문을 통한 혹독한 취조가 끝나고 이재유는 1937년 4월 23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이재유는 1941년에 개정된 치안유지법에 신설된 예방구금제도의 적용을 받아 1942년 징역 6년의 형기가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주보호교도소에 다시 수감된다. 모진 고문 끝에 얻은 후유증과 힘겨운 감옥 생활로 지병인 각기가 심해져 그는 해방을 불과 10개월 앞둔 1944년 10월 26일 40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왜 '이재유'인가?

이재유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경성트로이카'의 작가 안재성씨.

이재유에 관한 논의는 그동안 활발히 이뤄지지 못했다. 그동안 나온 단행본도 김경일 교수가 지은 '이재유 연구(창작과비평사)'와 안재성씨가 지은 이재유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경성트로이카'가 전부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재유와 그의 동료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미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진 인물인 '이재유'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안재성 씨는 현재 우리에게 ‘이재유’라는 인물이 갖는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번째, 이재유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조선에서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완성이라는 추상적 목표가 아닌 조선의 독립, 조선어 사용, 조선 역사 학습, 노동의 질 향상 등 그 당시 사람들이 처한 현실에서 필요한 것을 해결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안재성씨는 오늘의 운동도 이를 본받아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영역에서 필요한 것을 올바르게 잡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로, ‘독서회’라는 자리를 통한 꾸준한 학습을 통해 자본주의와 세계정세와 관련한 그들의 시야가 넓어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재유의 동료였던 이현상의 경우 빨치산 활동을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꾸준한 학습을 계속했다. 안재성씨는 “요즘 노동운동의 경우 원론적인 내용을 공부하기 보다 사건을 분석하는데만 급급하다보니 현상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다. 학습의 부족함이 노조 이기주의라는 비판을 부추기는 것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70년도 넘게 지난 그 시절, 어두운 시대를 바꾸기 위해 활동했던 이재유. 그러나 그가 활동하면서 남긴 모습들은 이미 우리의 기억속에 잊혀지고 있다. 단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지워버리기에는 우리보다 먼저 고민했던 그의 흔적이 너무나 소중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