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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평화, 통일을 부르짖은 이재호 열사를 기억하다 육체를 희생해 어두운 시대적 현실을 밝게 비춘 그의 삶
등록일 2016.06.10 23:08l최종 업데이트 2016.06.13 00:46l 장민국 기자(glory_gor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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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428일 서울 신림사거리 앞은 아침 일찍부터 수많은 학생들과 경찰들의 대치로 폭풍전야의 고요함에 휩싸였다. 짧은 적막감도 잠시, 학생들은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이들에 무자비한 폭력으로 대응했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이재호 열사는 스스로 불을 붙여 장렬하게 산화했다. 열사의 거사가 어느덧 30주기를 맞은 지금, 열사의 인생과 고뇌를 따라가 봤다.


   

광주의 사나이


  이재호 열사는 19641229일 광주광역시 북구 용두동에서 6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조부모와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커다란 대가족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이재호는 공부뿐만 아니라 노래, 미술, 글짓기, 서예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팔방미인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6년 동안 성적 우수상을 놓친 적이 없었고, 여러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또한 리더십도 뛰어나 가정에서는 동생들의 리더로, 학교에서는 학급 반장으로 활약했다. 그가 어릴 적부터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평생을 농업에 종사한 이재호의 아버지는 제 1공화국 시절 야당 활동을 하는 등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늘 그에게 노력과 승부욕을 강조했다.


  열사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인생의 분기점이 될 만한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1980년에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 운동이었다. 대학생을 필두로 한 광주 시민들의 시위, 계엄군의 유혈 진압, 힘없이 주저앉는 시민들, 도청에서 벌어진 마지막 피의 항쟁. 약 열흘 동안 비밀리에 진행된 처절한 살육의 현장을 직접 마주한 이재호는 이후 참혹한 현실 속에서 그가 다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당시 광주에서의 기억은 훗날 그가 학생 운동에 몰두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후 이재호 열사는 모든 것을 제치고 공부에 집중했고, 노력 끝에 1983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부모님은 법대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 누구도 법 이전에 정치라는 이재호 열사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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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사가 운명한 지 나흘 후 1986년 5월 30일 서울대에서 이재호,김세진,이동수 열사의

합동장례식이 진행됐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학에 입학한 열사는 더욱 더 학생 운동에 열을 올렸다. 1학년 때부터 학년 대표로서 정치학과 학생회 활동과 교내 지하서클 아카데미활동을 병행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술자리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며, 이재호 열사는 무언가 뒤틀린 시대의 참극에 조금씩 눈을 떴다. 열사가 대학에 입학한 해의 5월에 처음으로 참여했던 시위는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희미하던 그의 인생에 뚜렷한 방향을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학생들의 열띤 함성과 서로 팔을 끼고 횡대를 이룬 스크럼(scrum)의 행진은 1980년 광주의 그 날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시위의 현장에서 흥분과 분노를 느끼며 사회의 진보에 앞장서야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열사는 학생 운동에 전념하며 언제나 시위의 선두에 서서 학생들을 이끌었다. 더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하숙에서 자취방으로 거처를 옮겨 그의 자취방에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그의 머리는 밤낮 없이 사회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당대를 살아가는 대학생으로서의 의무에 대한 성찰로 가득 찼다.


  학생 운동에 열띠게 참여하다보니 이재호 열사는 3년 동안 세 번이나 구류 신세를 져야 했다. 학생 운동에 참여할 때마다 이재호는 고향의 가족들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워했다. 특히 19852·12 총선을 앞두고 진행된 2·5 시위에서 연행돼 고향에서 아버지가 올라왔을 때는 이러한 고뇌가 더 심해졌다. 부모님의 기대에 벗어나는 것, 무엇보다도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는 것과 더불어 고향에 있는 동생들에 대한 생각도 그를 괴롭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괴로움에도 이재호 열사는 학생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한 정의이자 본분이었기 때문이다.



반미(反美)의 중심에 서다


  한편 1980년대에는 학생과 지식인 집단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반미 의식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쳐 전두환 정권에 들어서도 미국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한국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유지했다. 이처럼 국내 독재 정권을 비호하는 미국의 입장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레 반미 정서가 생겨났다. 이와 더불어 북한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 주둔하는 주한미군이 사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적 전략의 일환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견해의 핵심에는 1980년 광주 항쟁에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한국군의 군사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질서 회복을 위해 계엄군의 이동을 승인했고, 또한 5·18 광주 항쟁의 사후 수습 과정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하기보다는 사태 확산 방지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19823월에 발생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고신대 학생들은 미국에 광주 항쟁과 관련된 일련의 의혹을 추궁하며 부산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발생한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미국에 부과하는 목소리를 낸 것이다.


  광주의 참상을 생생하게 경험한 이재호 열사는 이와 같은 반미 분위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나아가 그는 반미 문제를 한국 근현대사를 잠식한 제국주의 문제로 확장시키는 깊은 문제의식을 가졌다.



  “고난에 찬 한국현대사는 일찍이 조선말기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민족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투쟁사는 새로운 조건변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시 단절된 채 현대사의 진전을 더디게 하고 있다. 그러나 서서히 떠오르는 광명을 맘으로부터 준비하듯, 역사는 그 알맹이로부터 외압의 모든 구차한 껍데기들을 과감히 쳐부수기 위한 일보를 내딛으려 한다. (중략) 역사는 미루지 않고, 선도적으로 실천하는 자만을 알맹이로 한다.”


   - 1985815일에 쓴 그의 일기 중 -


    

  이재호는 누구보다도 역사적 과오와 시대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알맹이가 되고자 했다. 이러한 열사의 의지는 1986년 본격적인 반미 학생 운동 참여로 가시화됐다. 이재호는 그해 3월 창설된 반전반핵 평화옹호투쟁위원회의 위원장 자리에 취임해 여러 반미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에는 대학교 2학년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최전방 부대에 입소해 일주일간 군사 훈련을 받는 전방입소교육이라는 교과 과정이 존재했다. 이재호는 이를 미제의 용병 교육으로 규정하고 전방입소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전방입소거부특위)’의 부위원장으로서 전방입소교육 거부 투쟁을 벌였다.


  전방입소거부특위는 학생들의 입소 날짜인 428일에 중앙도서관을 점거해 나흘에 걸쳐 농성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학교 측에서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중앙도서관을 휴관하자 전방입소거부특위는 연건캠퍼스 도서관으로 농성 장소를 변경했다. 그러나 이 또한 경찰에 의해 27일에 강제로 해산됐다. 이재호는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을 날이 다가왔다고 직감했다.

 


시대를 밝히는 꺼지지 않는 촛불


  전방 입소 당일이던 28, 오전부터 4백여 명의 학생들이 신림사거리로 집결했다. 이재호는 당시 함께 사회 운동을 했던 김세진(미생물학과·명예졸업)과 함께 근처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유인물을 뿌리고 연신 구호를 외쳤다.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경찰은 서로 팔을 붙잡은 시위대를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며 시위를 진압했다. 이재열과 김세진은 경찰들에게 폭력적인 진압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경찰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압을 계속하자 이들은 온 몸에 시너(thinner)를 붓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을 붙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숭고한 희생이었다. 분신 직후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진 이재호는 온몸의 80%3도 화상을 입은 채 한 달가량 고통에 겨워하다가 결국 526일 오후 3시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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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보이는 건물의 4층 옥상이 이재호 열사가 분신한 곳. 출처:김세진이재호기념사업회



  불행히도, 두 열사의 충격적인 죽음은 당시 언론에 의해 왜곡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동아일보는 사건 직후 대학가에서는 어떠한 이슈가 생겨나기만 해도 격렬한 행동을 서슴지 않아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여간 착잡하지가 않다며 열사의 희생에 대해 평했다. 경향신문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현장실습이라 할 수 있는 입소훈련마저 거부하고 격렬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이 6.25를 전혀 모르는 전후 세대라는 점에서 반공·안보의식이 흐트러진 것이 아닐까 걱정이 태산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 보도와는 달리 이재호가 분신을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우리 민족의 자주와 통일이었다. 열사는 미국에 대한 엇갈리는 시선이 공존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반미 의식을 수면 위로 꺼내 공론화시켰다. 미국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에 대한 논란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이 사건은 미국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이재호는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 줌으로써 이를 비로소 실현한 것이다. 그가 앞장선 80년대 반미운동은 90년대 이후 통일운동으로 계승됐다. 이정승(영문학과·졸업) 씨는 추모글에서 그날 이후 오늘까지도 그들이 외치고 지키고자 했던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이념의 시대가 아닌 현재에도 생명력을 갖고 우리 사회의 앞날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했다.


  죽음 이후 이재호 열사는 가문의 선산에 안치됐다가 1994년 망월동 5·18 묘역으로 이장됐다. 이후 2001년에는 비로소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명예가 회복됐고, 2008년 서울대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함으로써 25년 만에 졸업하게 됐다. 분신(焚身)으로 함께 생을 마감한 김세진 열사를 함께 기리는 그의 추모비는 중앙도서관 옆 잔디밭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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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인문대 2동 근처에 있는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추모비.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열사의 뜻과 정신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방법으로 계승되고 있다. 매년 4월에는 김세진 열사와 합동 추모식이, 5월에는 망월동에서 열사의 추모식이 진행된다. 2008년에는 <과거는 낯선 나라다>라는 제목의 추모 영화가 발표돼 열사의 넋을 기렸다. 현재는 민주화 열사 중 처음으로 그의 캐리커처가 제작 중이다. 서영삼 이재호열사추모사업회 회장은 요즘 사회를 좌표평면에 비유하면 너무 y(양적 발전)에 집중된 것 같다열사의 죽음은 우리에게 x축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라고 말한다. 광주의 아픔을 평생 마음에 기리며 사회에 맞서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이재호. 그의 모습과 신념은 역사가 요구하는 미루지 않고 선도적으로 실천하는알맹이로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