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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등록일 2016.12.14 22:14l최종 업데이트 2016.12.15 22:55l 이심지(정치외교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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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래서’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사랑의 언어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앎의 증가는 경이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그만큼의 고통 역시 수반한다. 이상화된 존재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서로에 대해, 차라리 몰랐더라면 더욱 좋았을 뻔한 것들이 많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에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같은 보드라움은 설 자리를 잃기 쉽지 않나. 어떤 임계점을 지났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갖은 곡절을 견뎌낼 수 있게 한다. 설령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아흔 아홉 가지의 이유가 있다 해도 다른 한 가지의 마음이 그 모두를 넘어서고야 마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다.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 세상사에서 희망을 말하는 일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난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갈수록 낭만은 점차 비관이 되었고, 인류의 진보를 철저히 믿었던 스무 살 대학생은 불과 4, 5년의 시간을 거쳐 마음속에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을 품게 되었다. 한때 둘도 없는 ‘희망 예찬론자’였던 이의 순진함을 세상은 손쉽게 비웃었고, 나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잃었다.

  여기, 세월호 사건을 ‘교통사고’라 일컫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아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여성을 두고 “그러게, 왜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녀서”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함께 했던 집회에서, 그 자리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쓰러진 백남기 농민을 뻔뻔하게도 부검하려는 ‘국가’가 있었다. 넘쳐나는 가벼움 속에서, ‘사람인데 사람인 게 어색(오은, '미시감')’했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주말마다 대규모 촛불집회를 한다. 혹자는 주권자 시민의 무서운 힘을 보았다고,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김 아무개의 예상과 달리 촛불이 꺼지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종국에 박근혜를 끌어내리는 것은 가능할까? 박근혜-최순실이라는 ‘거악’을 제거하고 나면, 나의 세상은 좀더 살기 좋은 곳이 될까? 잘 모르겠다. 이미 너무 많은 문제가 산적한 이 땅에 희망이 있기는 한가? 나는 ‘캐나다로 이민을 갈 게 아니라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우스개가 별로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런 시절일수록, 비관적인 마음이 자꾸 고개를 들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새길 때에만 비로소 ‘극복’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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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광화문에서는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함성이 울려퍼졌다. ©박나은 사진기자



  세상 살기 그래도 좋아졌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고, 언젠가 좋아질 거라는데 나는 그것도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더 좋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고 싶다. 앞이 막막하기만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주저앉아 울고 있는 나를 토닥이고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은 같은 길을 함께 걷자 약속한 이들이었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파렴치함이 판치는 세상에, 제 몸에 생채기를 내면서도 ‘계속 싸우는 것 외에는 달리 어찌 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뭉쳐 만들어낸 절박함의 온기가 다시금 나를 데우곤 했다.

  희망의 언어는 공허하고 무책임한 단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만이다. ‘그저 스스로 여기 존재하는 희망’이란 없는 것이고, 결국 희망이란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할 가치가 없다”라는,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명대사는 현실의 부조리와 절망을 억지로 외면하려는 ‘최면’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허무와 비관이 이미 지배하는 세상에 우리가 끈질기게 덧붙여 마땅한 것은 밝은 미래를 갈구하는 자세뿐이라는, 간절한 요청에 가깝다. 그래서 이런 시절일수록, 더욱 악착 같이 일상을 지켜내고,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것, 그리고 ‘해일이 몰려올 때 다른 이를 마구 밀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를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어주는 것’(‘페미당당’의 페미니스트 시국선언 중), 그것이 내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기 위해, 혹여 자신들의 존재로 인해 표를 얻는데 불리하지는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도라에몽 탈’까지 써 가며 선거운동을 도왔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신이 낙선할 경우 세월호 진상규명노력의 동력이 타격받을 것을 걱정한 박 변호사에게 “우리는 늘 지는 사람들이 아니냐”며 도리어 격려의 포옹을 전했다는 그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써 노력한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귀한 이들에게 내어줄 마지막 한 줌의 온기 정도는 더욱 기를 쓰고 지켜내야 한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아직, 희망을 노래할 힘이 조금은 더 남았다.


* 제목은 최영미 시인의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에서 빌려왔음을 밝힙니다. 


이심지(정치외교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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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좋아해서 인간을 믿고 싶은 사람. 일곱 살 때부터 글쟁이가 되고 싶었고, 스물넷에 보니 어느새 ‘프로불편러’가 되어 있었다. 부족한 나의 존재가 세상에 아주 약간의 온기라도 보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