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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번역의 이론과 실제
등록일 2016.12.14 22:20l최종 업데이트 2016.12.15 13:14l 나수호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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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학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오랜 관심사이지만 최근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영역판이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이후로 그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그런데 번역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얼핏 보면 간단한 작업인 것 같지만 실제로 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된다.


  흔히 번역서를 보면 ‘누구누구 옮김’이라는 말로 번역가의 이름을 표시하는데, 이를 미루어 볼 때 번역이 무엇을 옮기는 작업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어를 봐도 마찬가지이다. ‘Translate’라는 단어는 라틴어 ‘translatus’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는 ‘무엇을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지고 간다’라는 뜻이다. 즉, 옮긴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옮겨지는 대상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이다. 우선 그 대상을 텍스트의 ‘의미’라고 규정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 의미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원문의 언어 그 자체에 있는가? 아니면 원문에 대한 각 독자의 해석에 있는가?


  전자의 경우는 의미가 원어의 단어나 문법에 내재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워프(Benjamin Whorf)가 주장한 언어 상대성 가설에 의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강형(强形) 언어 상대성 가설은 언어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데 오늘날에는 이것을 인정하는 학자는 많지 않다. 오히려 약형(弱形) 가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인데 언어가 사고방식에 영향만 준다는 것이다. 약형 언어 상대성 가설만을 받아들인다 해도 어떤 텍스트의 의미 중에 일부가 언어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후자의 경우는 의미가 언어에 위치하고 있는 기존사실이 아니라 그 언어를 읽고 해석하는 독자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인간의 의사소통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모형을 제시하고 있는데 섀년 위버 모델(Shannon-Weaver model)을 보면 발신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메시지로 암호화하여 매체를 통해 보내면 수신자가 그 메시지를 받아서 해독하여 발신자의 의미를 해석한다. 구어로든 문어로든 그 과정이 같다. 그러니까 언어라는 체계는 의미를 암호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견해 중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사실 이 둘은 상호배타적인 명제가 아니라서 모두 맞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쪽에 극단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생긴다. 의미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면 번역이 불가능해진다. 언어 자체가 전달이 안 되니까 의미 전달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번역가의 해석에 너무 의지하면 작업이 번역보다 번안에 더 가까워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원문에 대한 충실함 없이 원문과 거리가 먼 텍스트를 창작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타협하는 길 즉, 원문을 존중하면서 독자와 소통하는 과정까지 고려하는 것이 최상책일 것이다.


  번역을 실제로 하게 되면 위와 같은 이론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이론적 접근법을 한 번 선택하면 그만인 것은 아니다. 문장 하나하나를 번역할 때마다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한영 번역은 양쪽 언어와 문화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이다. 언어가 생각을 결정하지 않더라도 번역할 때에 메시지를 언어로 암호화해야 되기 때문에 언어적인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원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공유하는 사회·문화·역사적 배경이 번역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공유하는 배경과 다르기 때문에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더라도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어와 영어는 언어적인 차이점이 상당히 많은데 그 중에 많이 언급되는 예로 색깔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들 수 있다. ‘노랗다’, ‘노르스름하다’, ‘누렇다’, ‘누르스름하다’, ‘노릇노릇’ 등은 모두 노란 색을 표현하는 단어인데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어서 번역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영어에도 여러 사물을 빌려서 ‘golden’, ‘amber’, ‘lemon’, ‘sandy’ 등 ‘yellow’를 다양하게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한국어권 독자가 ‘노릇노릇하다’에서 받은 느낌과 영어권 독자가 ‘golden’에서 받은 느낌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근접하다고 본다. 언어적인 특징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차이도 많다. 예를 들면  ‘한(恨)’이나 ‘눈치’와 같은 개념은 한국 사회·문화·역사에 깊이 뿌리를 둔 것이다. 그런데 영어로 ‘한’의 모든 뉘앙스를 포착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고 해서 번역이 불가능할까? 문맥 없이 한 단어로 번역해야 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번역은 단어 하나를 단어 하나로 교체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리고 독자의 언어에 어떤 단어가 없다고 해서 그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 깊이 뿌리박은 ‘한’이나 ‘눈치’ 같은 개념도 번역이 가능하다.


  물론 위와 같은 예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다. 이런 문제는 상대적으로 풀기 쉬운 축에 속한다. 이것보다 고민해야 할 문제는 번역을 통해 전달하려는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결국에는 옮겨지는 것이 ‘경험’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즉, 독자가 원작품을 읽을 때에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데 원작품을 읽을 수 없는 독자에게도 그와 같은 경험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닐까.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번역가에게는 양쪽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구되며 두 문화 간의 틈을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놓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단어의 의미를 옮기는 단순한 수준보다 훨씬 고차원적 작업이다. 번역가가 두 문화, 두 언어, 두 세계의 경계에 자리를 잡고 그 사이를 왕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무리 한국 문학의 아름다움을 소개해주고 싶더라도 그것을 세계의 독자들이 소화하고 감상할 수 있는 모양으로 제공해주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성공한다면 서로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는 데에 큰 몫을 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의 정세를 보면 이보다 더 절실한 일이 없는 것 같다.



나수호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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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주립대학교(빙엄턴)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학사를 취득한 후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대에서 한국 구비문학을 연구해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트릭스터 인물 등 국문학 연구 이외에 한국문학 번역도 해왔다. 번역한 작품 중에 김영하의 <검은 꽃>과 김남천의 <大河>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