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호 > 특집
문제로 규정된 장애인, 이제 문제를 외치다 끊임없는 요구에도 장애인정책은 제자리걸음
등록일 2017.03.08 16:15l최종 업데이트 2017.03.10 19:59l 정지훈 기자(fighter144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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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8월 21일 광화문 지하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얻어내기 위한 장애인들의 투쟁이 시작됐다. 광화문 지하투쟁은 1600일이 넘게 이어졌고 수많은 촛불이 그 자리를 오고 갔다. 장애인 단체들은 민중총궐기, 촛불집회 등 광화문 집회의 터줏대감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애인들이 목표했던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국민들 대다수가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지금 장애인들은 다시 한 번 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장애인들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며 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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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지하 장애인 농성장의 모습 ⓒ신일식 기자



반영되지 않는 장애인정책 요구안 


  장애인단체들은 대선, 총선 시기에 연대체제를 꾸리고 정책간담회를 열어 정치권에 장애인정책의 핵심과제를 전달해 왔다. 2016년 3월 14일 개최된 ‘20대 총선 장애인정책토론회’에서 이들 연대는 장애인정책 요구안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는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관계자가 참여해 장애인 측과 함께 관련 사안을 검토했다.

  

  당시 주된 요구안은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 ▲탈시설 체계 구축 ▲장애인복지예산 수준 확대였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은 현재 장애인복지 전반을 규정하는 ‘장애인복지법’의 대안이다. 이 법은 장애인복지법에서 정의된 장애의 개념을 바꾸고 실정에 맞게 장애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현 장애인복지법은 장애를 신체적, 정신적 손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장애를 이처럼 의학적으로만 정의할 경우 장애인들의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 조건은 장애인복지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지 못한다. 장애인복지서비스가 장애인실정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환경, 경제적 조건 등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장애 개념이 확립돼야 한다.

  

  장애인단체들은 장애인권리보장법이 의미를 가지려면 현행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애등급제는 의학적 기준으로 장애를 15개 유형, 6개 등급으로 나눈 것으로 장애인복지서비스의 기준이다. 여기서도 장애인들의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 조건은 고려사항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4급에 해당하는 장애를 가졌을 경우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4급 이상에 해당하는 지원을 받기 어렵다.

  

  부양의무제는 기초생활수급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도 부양의무자(수급신청자의 배우자, 부모 또는 직계혈족인 자녀와 그 배우자)가 부양능력이 있다면 수급을 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는 제도다. 부양의무제 하에서 부양능력이 인정되는 부양의무자가 실제로 수급신청자를 부양하기 어려운 상황이어도 수급신청자는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예컨대 수급신청자의 자녀가 일정 가격 이상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면 당장의 소득이 없어도 수급신청자는 수급자격을 얻을 수 없다.

  

  한편 탈시설은 장애인들이 점차 집단거주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거주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를 일컫는다. 탈시설에는 장애인들을 격리해야 할 존재가 아닌 함께 살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가 전제돼 있다. 시설에서 자립해서 혹은 애초에 시설에 들어갈 필요 없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장애인들에게 탈시설 체계 구축은 꼭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장애인복지예산을 확대해야 한다는 사안은 장애인복지 수준을 적어도 OECD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내용이다. OECD 장애인복지지출 통계에 따르면 2013년 한국의 GDP 대비 장애인복지지출 규모는 0.61%로 2013년 조사된 33개국 중 30위에 해당한다. OECD 국가 평균인 2.11%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기도 하다.

  

  20대 총선 이전부터 장애인들은 위 사항들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그러나 요구는 큰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과 장애등급제 폐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었다. 19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 중앙공약에도 장애등급제를 개선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20대 총선 정책간담회에 참여했던 야당들의 공약 역시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과 장애등급제 폐지를 포함했다.

  

  그럼에도 진전은 거의 없었다. 2017년 1월이 돼서야 장애인권리보장법의 기본 내용을 담은 ‘장애인 권리보장 및 복지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의원에 의해 발의됐다. 2014년 3월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서는 빠르면 2016년부터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겠다는 논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2015년에 이르러 기존 6등급제를 중증과 경증의 두 단계로 간소화한다는 방침만을 내놓았다. 현행 장애복지서비스가 주로 1-3급과 4-6급 두 단계로 나뉘어 운영된다는 점에서 등급제 간소화를 실질적인 개선으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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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양의무제 개정안은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19대 국회에서 수차례 발의됐다. 그러나 부양의무제 폐지보다는 부양의무제의 기준을 완화하거나 부양의무제로 인해 수급자격이 박탈된 신청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20대 국회에서는 부양의무제 폐지를 골자로 한 국민기초생활 보장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아직 소관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탈시설 체계 확립은 요원하다. 거주정책을 비롯해 탈시설의 기반이 되는 지원정책은 미비하다. 게다가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국에도 탈시설 지원을 담당하는 부서는 없다. 탈시설 계획을 수립하고 지원하는 공적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이다.

  

  장애인복지예산 규모는 오히려 축소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복지예산이 감축됐고 덩달아 장애인사업 관련 예산도 줄었다. 2015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는 복지 구조조정을 명목으로 총 3조원의 재정 절감을 목표로 하는 복지재정 효율화 추진방안이 마련됐다. 이에 2015년 8월에는 지자체 유사·중복사업 정비 방안이 확정됐다. 이 과정에서 지자체가 시행하던 장애인복지 자체사업 230개가 정비대상으로 지정되면서 약 1813억 원 규모의 장애인복지예산이 감축됐다.



문제는 일방적인 장애 규정과 관련법의 강제성 부족


  장애인들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는 “장애와 관련된 문제가 장애의 실정과 무관하게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됐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장애등급제의 문제도 국가가 일방적으로 장애의 정의를 협소하게 규정해 장애인의 상황을 모두 반영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했다. 


  부양의무제에서도 장애가 우선적으로는 국가가 아닌 가족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보인다. 조흥식 교수(사회복지)는 “가족공동책임제라는 민법적인 요소가 부양의무제에 반영돼 있다”며 이 구조를 설명했다. 한국의 가족중심문화에서 가족이 구성원의 안위를 책임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고가 부양의무제에 반영됐다는 것이다. 이는 가족의 책임만으로는 장애를 부양하기 어렵다는 실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또 하나의 일방적 규정이다.


  탈시설 정책이 미비하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보인다. 현 정책에는 탈시설 개념 자체가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심지어 서울시가 2015년 발표한 ‘탈시설화 5개년 계획’은 ▲시설 보호기능 강화 ▲시설의 소규모화처럼 시설을 유지, 강화하는 방안을 포함하는 모순을 보였다. 그동안 국가는 장애인들을 사회에서 격리해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파악해 온 것이다.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의 문제도 있다. 조흥식 교수는 “관련법의 강제성과 복지와 인권에 대한 강제성이 약하다”라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장애인복지와 관련된 법을 만들더라도 예산이 없으면 시행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의미다. 즉 관련정책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예산의 배정까지 강제할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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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보장위원회 앞에서 사회보장제도 후퇴를 규탄하며 열린 '나, 다니엘 블레이크' 선언 행동 ⓒ최한종 사진기자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기 위해 장애인단체들은 대선을 앞두고 장애인대선연대를 구성하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지난 총선 때와 비슷한 사안을 주장하면서도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법안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경석 대표는 “우리가 요구하는 변화는 장애 문제를 근간에서 바꾸는 것”이라며 투쟁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어 그는 “문제로 정의된 사람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라는 사회학자 맥나이트의 말을 빌려 장애인들이 장애 문제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정의된 장애인들이 이제 다시 장애 문제를 외치고 있다. 대다수가 변화를 열망하는 지금이 바로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