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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를 외친 순수한 가슴, 이동수 열사 엄혹한 시대에 뜨겁게 자유를 꿈꾸다
등록일 2017.03.10 00:20l최종 업데이트 2017.03.10 19:44l 김종현 기자(akdtkd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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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깊은 탄광의 카나리아라고 했다. 광산 노동자들의 숨은 그들이 데려온 한 마리 카나리아에게 달려있다. 카나리아는 갱도 안 산소 농도가 낮아지는 걸 가장 먼저 느끼고 운다. 시인은 카나리아처럼 자유의 농도가 옅어지면 가장 앞서 괴로워한다.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한껏 몸을 웅크릴 때, 시인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시로써 몸부림친다.

  이동수 열사는 6월 항쟁이 일어나기 1년 전, 1986년 5월 20일 학생회관 4층에서 분신, 낙사했다. 이동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열렬한 투사가 아니었고, 지금은 변변한 기념사업회 하나 없다. 하지만 이동수는 거리에서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싸웠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를 숨막혀했다. 그는 한국사회를 질식시키던 폭력과 억압을 견딜 수 없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부르짖어야만 했던, 시인 같이 순수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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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열사의 영정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제공



과묵했지만 후배들을 따뜻하게 챙겼던 선배

  이동수는 자신의 신념을 쉬이 밖으로 내비치지 않았다. 함께 학교를 다녔던 원예학과 83학번 동기와 86학번 후배들은 평소 그의 생각을 알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술자리에서도 정치나 사회현실에 대한 얘기는 잘 꺼내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1986년 원예학과 과대표였던 이상욱(원예 86·졸업) 씨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동수 형은 잇몸이 다 보이게 그냥 씩 웃었다”라고 묘사했다. 냉소나 무관심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관심과 애정 어린 웃음이었다.

  그는 말이 없어도 온화하고 다정다감했다. 86학번 새내기들은 이동수 열사를 큰형처럼 따르고 의지했다. 이상욱 씨는 이동수가 갓 상경한 ‘촌놈’이었던 자신의 “힘들다는 호소를 가장 잘 받아줬던 형”이었다고 말했다. 박종대(원예 86·졸업) 씨는 열사가 “돈이 없어서 점심을 굶는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고, 술자리에 꼭 참석해서 술도 사줬다”라고 회고했다.

  이동수는 곤경에 처한 후배를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김충범(원예 86·졸업) 씨는 한 선배의 테니스 라켓을 맡아줬다가 잃어버린 날을 떠올렸다. 김 씨는 선배의 테니스 라켓을 공부하던 도서관 자리에 두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니 라켓이 없어졌다고 기억했다. 잃어버린 테니스 라켓의 만만찮은 가격에 “한숨만 나오고 갑갑했다”라고 김 씨는 말했다. 하지만 이동수가 운 나쁘게 잃어버린 셈 치라고 라켓 주인인 자신의 동기를 설득했다. 김 씨는 열사와의 다른 기억은 희미해도 그 일화만은 또렷하다고 강조했다.


강제징집과 복학, 권위주의 사회와 불화하다

  이동수는 숭실대에 81학번으로 들어갔다가 삼수를 해 1983년 원예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입학한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아 군대를 갔다. 삼수 생활 이후 입학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입대를 미루기 힘들었다.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성격 때문에 군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이동수가 군 복무 중이던 1985년 2월에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끈 신민당이 여당인 민정당의 독주를 막고 직선제 개헌 투쟁의 발판을 마련했던 역사적인 선거였다. 하지만 총선 당시 군대에선 부정투표가 횡행했다. 인권운동가 박래군 씨는 “당시 군대에서는 야당에 투표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라고 증언했다. 군 간부들은 야당을 찍은 ‘반란표’가 나오면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 (<한겨레21>, “선거의 추억 인권의 미래”) 병사들은 기표를 하면 부대장에게 확인받고 투표함에 넣었다. 박종대 씨는 이동수가 고분고분하게 여당에 투표하느니 구타당하길 택했다고 전했다. 그는 “(동수 형이) 남은 군 생활 동안 얼마나 고통을 당했겠나”라며 말을 아꼈다.

  전역 후 복학한 학교에도 권위주의가 스며들어 있었다. 학번 간 위계질서는 엄격했고 선배가 후배에게 군기를 잡았다. 어느 81학번 학생이 자신과 동갑이지만 83학번인 이동수에게 존댓말을 쓰라고 강요했다. 이를 거부한 이동수에게 81학번들은 본보기로 집단 린치를 가했다. 아무도 모르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학교 내 폭력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조리에 굴종하지 않았다. “‘아니오’라고 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 (이동수 열사의 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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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학과 86학번들에게 남긴 유서의 사본 일부분. 신동엽의 시를 인용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폭압의 시대에 외로이 고뇌한 영혼

  이동수가 복학한 1986년 봄은 유신 이래 가장 엄혹했다. 1983년 말, 전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 조치로 시작된 유화 정책이 유례없이 강력한 억압과 폭력으로 전환됐다. 1985년 2월 총선에서 신민당이 선전했고, 계속된 탄압에도 학생·노동운동의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은 시민의 피를 제물로 삼아 생명을 연장하려 했다.

  이선태(사회 83·졸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관리실장은 1986년을 “(군사독재정권과 민주화운동세력의)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이 고양됐던 시기”라고 정의했다. 학원자율화 조치로 물러갔던 경찰이 학교에 돌아왔다. 전투경찰과 관악경찰서 형사들이 정문을 지켰고, 교정 곳곳에 사복경찰이 포진했다. 교내에서 모든 집회는 금지됐다. 이 실장은 “숨쉬기도 정말 힘든” 시기였다고 그 당시를 돌아봤다.

  이동수 열사는 폭압적인 시대에 맞서 싸우려 했다. 그는 복학한 뒤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 경찰은 이동수가 당연히 학생운동조직의 일원이라고 여기고 고문했다. 그의 팔을 앞으로 뻗게 하고 각목으로 내리쳤다. “각목에 맞아 퉁퉁 부은 팔을 보여줬다”라고 박종대 씨는 회상했다. 하지만 운동권이라는 증거를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자 경찰은 이동수를 풀어줬다.

  이동수는 끝내 학생운동조직에 발 담그지 못했다. 야학을 비롯한 학외 운동조직에도 마찬가지였다. 권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가정에서 받은 교육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고 미뤄 짐작된다. 이동수 본인은 휴가 나온 군인처럼 검은 야상만 입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지만, 그의 집안은 소박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의 아버지는 용인 자연농원(현 삼성 에버랜드)의 최고위 임원이었다. 그가 살았던 서울 방배동 집에는 “테니스 코트만한 잔디밭”이 딸려 있었다. 4월 어느 날 박종대 씨는 이동수의 집에 중간고사 공부를 하러 갔다. 이동수 열사는 전화 한 통으로 외박을 허락받는 박 씨에게 “그런 (자유분방한 집안) 분위기가 부럽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동수 형의) 그 말 속엔 집안의 강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배어있었다”라고 설명했다. 한국 최고의 기득권층인 아버지의 기대를 받았던 아들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할 수 없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조용했던 그도 술자리에서 울분을 토했다. 박동우(원예 83·졸업) 씨는 평소엔 같이 어울리지 않았던 이동수 열사와 막걸리를 마신 날을 기억했다. 이동수 열사가 죽기 한 달 남짓 전이었다. 박 씨는 이동수가 “굉장히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사회의식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함께 노래하고 토론하고 사회에 대한 분노를 공유했다. 하지만 순수하고 예민했던 이동수의 정신이 기댈 곳은 없었다. 박종대 씨는 “(이동수 열사의) 자유로운 영혼이 집, 학교, 사회, 모든 측면에서 구속돼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억압적인 주변 환경이 그를 벼랑으로 몰아갔다.


갑작스런 분신, 해석되지 못했던 비운동권의 죽음

  1986년 5월 20일 캠퍼스는 오월제 행사가 한창이었다. 풍물놀이와 민중가요 공연이 열리고 장터에서는 막걸리와 안주를 팔았다. 이상욱 씨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걸어가다 2주 전부터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이동수를 만났다. 그는 옛 공대 언덕에 앉아 가만히 학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동수가 자신은 학교를 그만둘 것이라며 이별주를 마시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와 친했던 83, 86학번들이 모여 공대 쪽 철조망에 난 개구멍을 넘어 관악산 유원지로 술을 마시러 갔다. 철조망을 지키던 전경들이 가방 검사를 했지만 이동수의 가방은 넘어갔다. 이 씨는 “그때 전경들에게 (분신에 필요한 물건이 들어있었을지 모를) 동수 형 가방이 걸렸어야 했다는 생각을 나중에 했다”라고 담담히 말했다. 이동수는 술을 입에 대지 않고 후배들에게 “열심히 살아라”라고 당부했다. 그는 과대표인 이 씨에겐 편지를 한 통 남겼다. 그게 유서일 줄은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몰랐다. 86학번들이 2시에 있는 영어 랩 수업을 들으러 가면서 어색한 술자리가 끝났다.

  오후 3시 30분경 이동수는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했다. 문익환 목사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연설 중이었다. 분신하기 전 이동수는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폭력경찰 물러가라”,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어용교수 물러가라”라고 외쳤다. 그가 동시에 뿌렸던 유인물에는 군사독재정권과 미제국주의 비판과 더불어 일본제국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선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관리실장은 “어용교수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당시 학생운동에서 주요하게 다루던 주제는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그 구호들은 이동수가 홀로 사회를 고민한 결과였다.

  분신한 뒤 학생회관에서 추락한 이동수는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운명했다. 학교에선 분노한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 정문까지 전진했다. 사방에 최루탄이 터지고 경찰이 동원되자 시위 대열은 뿔뿔이 흩어졌다. 원예학과 동기와 후배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동수가 분신했다는 소식을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박동우 씨는 “동수가 분신을 할 것이라는 언질도, 낌새도 전혀 없었다”라고 돌이켰다. 고인의 유서를 받았던 이상욱 씨는 이듬해 6월 항쟁 전까지 1년을 우울증에 시달렸다. 박종대 씨도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수업도, 아무 것도 의미 없었다. 1년 가까이 방황했다”라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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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22일 아크로에서 열린 이동수 추모제. 농대 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경향신문


  언론은 이동수의 죽음을 ‘비운동권의 죽음’이라고 보도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숱한 말이 오고 갔다. 누군가는 개인적인 문제가 그를 죽게 했다고도 말했다. 학생운동조직에서 활동해 본 적 없는 대학생이 왜 분신했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다음날인 5월 21일 국어국문학과 83학번 박혜정이 한남대교에서 투신했다. 또 다른 ‘비운동권’이 죽었다.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꽃피워내다

  그러나 이동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의 죽음이 시대를 고뇌하고 성찰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이동수 열사는 학생운동조직의 일원으로서 군사정권에 대항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군사독재와 병영문화,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분신을 택했다. 이상욱 씨는 이동수 열사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동수 열사의 진정성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아가 민주화에 불을 붙였다. 박종대 씨는 이동수 열사의 죽음을 겪고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광주항쟁을 얘기하는 선배들에게 “빨갱이 아니냐”라고 말하던 그였다. 열사와 동기였던 박동우 씨는 열사의 분신 직후 농대 학생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이동수 열사의) 분신이 반독재,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어나가는 기폭제가 됐다”라고 평가했다. 이동수 열사를 비롯해 1986년, 민주화 열사들의 죽음은 가깝게는 10월 건대 항쟁으로 이어졌고, 이듬해엔 1987년 6월 항쟁으로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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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생대(200동) 왼편 샛길에 세워진 이동수 열사의 추모비


  분명 이동수의 죽음은 아프고 외로웠다. 그의 유가족은 고인을 거론하길 극도로 꺼렸다. 유가족은 현재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고만 알려져 있다.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던 탓에 이동수를 기리는 기념사업회도 없다. 그럼에도 자유를 노래했던 그의 정신은 잊히지 않고 기억된다. 이동수 열사가 죽은 지 23년 만인 2009년 11월, 강병철 교수(원예생명공학 전공)의 주도로 원예학과 총동창회가 열사의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 제막식에는 스무 명 넘는 원예학과 동문들이 참석해 고인을 기렸다. 스물다섯 해의 삶에서 마지막 두 달을 함께했던 86학번 후배들에게 이동수는 이렇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대들이 열심히 그리고 참되고 깨끗한 삶으로 매진할 수 있도록 먼 곳에서 지켜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피가 스며든 이 땅에서 자라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