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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oo, am America"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 (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등록일 2017.03.10 20:27l최종 업데이트 2017.03.11 14:48l 송재인 기자(gooay@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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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미국인)가 너무 자주 무시하거나 얼버무리고 간 역사가 있습니다(Too often we ignored, or forgot, the stories of millions upon millions of others)." 지난해 9월 24일 워싱턴에서 열린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의 개관식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했다. "화려하지 않은 웅변으로, 못이 박힌 손으로, 그러나 꾸준한 동력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산업을 세우고, 민주주의에 기여한 수많은 이들의 역사입니다(...who built this nation just as surely, whose humble eloquence, whose calloused hands, whose steady drive, helped to create cities, erect industries, build the arsenals of democracy)."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이 미국의 대표적인 박물관이 밀집한 '내셔널몰(National Mall)'안에 자리하기까지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1915년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릴 곳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이것이 구체적인 법안으로 의회에 상정된 것은 70여년이 지난 후였고, 2003년에야 의회를 통과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예산을 확보하며 마침내 2016년 9월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이 개관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질곡의 역사만큼이나 지난한 여정을 겪어 비로소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의 달(African American History Month)'인 2월의 어느 날, 그 역사의 공간에 직접 방문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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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의 전경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



지하 3층, 나무보다 깊고 어두운 곳에 뿌리 내려진 역사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은 지하 3층부터 지상 3층에 이르지만 역사관은 지하에만 자리하고 있다. 역사관은 노예제와 해방, 시민권 운동, 근현대의 역사를 각각 지하 3층, 지하 2층, 지하 1층에서 다루고 있다. 역사관에 입장하니 지하 3층부터 지상까지 층을 오르며 시대 순으로 전시를 관람하도록 안내받았다. 지하 3층,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가 시작됐다.


  걸음을 내딛자마자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1400년대 유럽과 아프리카 간 거래됐던 아프리카의 민속품들이었다. 식기와 종교 의례에 쓰인 장식품, 동물의 뿔 등이 전시돼있었다. 뭉툭한 토기들은 여느 민속품이 그렇듯 아주 익숙하게 보였다. 어느 때에나 존재하는 평범한 일상의 한 장이었다. 1400년대에는 국가라는 뚜렷한 경계도, 국민이라는 고정된 정체성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과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이들은 그저 '이웃'일 뿐이었다. 그들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일상의 조각들을 거래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동등한 위치에서 교환됐다.


  어쩌면 아주 평범하고 따뜻했던 시기의 풍경을 지나자 전혀 다른 온도의 전시품이 있었다. 차가운 철제 수갑이 있었고 그 뒤에는 한 눈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그림이 있었다. 그림에는 커다란 배가 그려져 있었고 배 안에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상품처럼 빼곡하게 배치돼있었다. 당시 아프리카 흑인을 어떻게 노예선에 실을지 계획한 도안이었다. 온통 차갑고 어두운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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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8년 노예무역 제한에 따른 영국 노예선 브룩스호(Brookes) 적재계획 도면


  1600년대가 되자 유럽국가들은 내부 결속을 견고히 하기 위해 국가 외부의 '타자'를 찾고자 했다. 그들은 생경한 문화와 종교를 가진 아프리카 흑인을 스스로와 구분 짓기 시작했고, 서로 다른 생김새를 우열관계의 지표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제국주의의 시작이었다. 유럽인은 아프리카 흑인에게 노예라는 직위를 강요했다. 아프리카 흑인은 유럽인에 의해 거래되고 소유됐으며 세대가 바뀌어도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서로 다른 문화를 교환하던 이웃은 상대를 거래하고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전시관 한편에는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이 쌓인 설탕가루 더미가 있었다. 이 투명한 가루들은 당시 백인들의 찻잔에서 녹아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이 미대륙에 도착해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옮겨지기도 전에 자발적으로든 비자발적으로든 목숨을 잃었다. 전시에 따르면 "아프리카 흑인 노예 100명 중 내륙에서 항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이는 64명, 배에 오른 이는 57명, 미대륙에 발을 디딘 이는 48명"뿐이었다. 그들은 옆 사람과 온 몸이 꼭 닿을 만큼의 작은 공간에서 차가운 수갑에 손과 발이 묶인 채 수 개월간의 항해를 견뎌야 했다. 지극히 비인간적 환경에서 많은 이는 자살을 택했다. 기나긴 항해에서 누군가는 상품을 잃었고, 누군가는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새하얗고 투명한 설탕이 녹는 과정은 어둡고 불투명했다.



지하 2층, 보다 완전한 시민이 되기까지 피워낸 새순들


  1775년 미국의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노예출신 아프리카 흑인들 또한 전쟁에 참여했다. 여전히 아프리카 흑인 병사들과 백인 병사들 사이에 차별이 존재했지만, 참전한 아프리카 흑인은 최초로 '미국인'임을 인정받았다. 전쟁은 "모든 이는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라는 독립선언문의 문구로 귀결됐고 남북전쟁이 끝나자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비로소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호명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호칭은 곧 그들이 미국에서 배제되지 않을 수 있다는 하나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지하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벽에는 수많은 물음이 새겨져 있다. "노예해방선언은 노예제의 폐지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것이 약속한 자유는 무엇인가?" "경제적 독립? 투표할 권리? 두려움으로부터 해방?" 지하 2층에는 노예 해방선언 이후에도 완전한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가 그러져 있었다. 자유를 스스로 정의하고 성취한 역사였다.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페지된 직후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제한적이었다. 남부에서는 '인종분리정책(segregation)', '짐 크로 법(Jim Crow laws, 공공기관에서 합법적으로 인종을 분리하는 것)'이 시행되며 또 다시 차별이 법제화됐다. 그들은 'colored'라는 푯말이 있는 공간에만 접근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비단 이 활자만이 아니었다. 만연했던 혐오와 차별의 움직임들이었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린치(lynching,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적으로 가하는 폭력.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경우 백인 군중들이 그들의 목을 매다는 방식으로 희생됨)를 당하는 사진이나 KKK(Ku Klux Klan, 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 반유대주의 등을 표방하는 미국의 극우 비밀 결사 단체)의 의복은 당시의 혐오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끊임없이 외치고, 모이고, 거리로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경시하는 미국의 주류 언론을 비판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신문을 만들었다. 이 신문들은 이전까지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오롯하게 담아냈다. 지역 내의 행사 보도부터 1차 세계대전 중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 착취를 고발하는 등 국가적 사건까지 광범위하게 다뤘다. 1910년 뉴욕에서 결성된 '전미 도시 연맹(The Urban League)'은 차별이 만연한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해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정착을 도왔다. 특히 그들은 이주자가 겪는 경제적 차별을 해소하고자 했다. 이주 시 겪을 상황을 면밀히 연구하고, 이주자들에게 직업 교육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는 20세기 초에 들어 급증하는 린치에 저항하기 위해 반-린치 캠페인을 추진했다. 더 많은 대중들에게 린치의 가혹함을 알리고 의회에 린치를 금하는 법안을 발의하도록 청원했다. 기자는 억압의 장면들에 위압감을 느끼면서도, 저항의 움직임들이 주는 힘을 느끼며 한 발 한 발 내딛을 수 있었다.


  쉽사리 걸음을 떼기 힘든 작품도 있었다. 비폭력 시위 'Sit-Ins'가 일어났던 식당의 의자들이 유리관 안에 전시돼있었다. 1960년 그린즈버러의 학생들은 백인 전용 식당에 앉아 정중하게 점심을 주문하고 자리를 지켰다. 흑인과 백인을 포함해 다양한 인종의 학생이 참여한 비폭력 시위였다. 그들은 백인 점원과 손님이 쏟아내는 모욕과 폭력에 답하지 않았다. 누군가 체포돼도 또 다른 누군가가 와 빈자리를 채웠다. 그들이 실제로 앉았던 의자들이 흰색도 검은 색도 아닌 수만 가지 색으로 보이는 것만 같았다.


  투쟁은 조금씩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1954년 연방대법원은 최초로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분리를 위헌이라 판결했다. 법정 앞에서 어머니와 딸이 따뜻하게 눈 맞추고 있는 당시의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가까운 학교를 눈앞에 두고도 수 마일이 떨어진 흑인 학교로 향해야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이들의 발자취가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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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 17주에서 공립학교의 인종분리를 불법이라 판정한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Brown vs Board of Education)' 이후, 대법원 계단에 앉아있는 네티 헌트(Nettie Hunt)와 그녀의 딸 니키(Nickie)


  마침내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됐다. 민권법은 모든 공공장소에서의 인종분리와 고용 차별을 금했고, 문맹 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을 금했다. 그 결과 더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공적 영역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벽에 쓰인 'Civil Rights Act'라는 거대한 활자에는 '평범한' 시민이 되기 위해 달려온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가 꼭꼭 눌어 담긴 듯했다. 자유를 학교로, 거리로, 버스로, 식당으로 넓혀가며 매일 같이 자유의 정의를 새로 쓴 이들의 역사였다.



지하 1층, 가지를 뻗어나간 인권운동


  지하 2층과 지하 1층을 연결하는 통로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X의 투쟁사진, 최초로 허용됐던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백인 미국인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제 진보와 성취의 역사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하 1층에는 여전히 저항의 역사가 있었다. 어쭙잖은 성취감을 꾸짖는 듯 했다.


  시민권 운동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 인권운동은 다양한 방향으로 구체화됐다. 각자의 계급, 젠더, 거주지, 향유 문화를 기반으로 여러 목소리들이 뻗어나갔다. 문화예술인은 대중문화에 팽배한 편견에 반대하며 '검은 것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는 문구를 내걸었고, 흑인 페미니즘(black feminism)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을 주축으로 재생산 권리와 동일임금을 외쳤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도시 근교로 밀려나는 현상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지하 1층에는 이런 장면이 수많은 사진으로 전시돼있었다.


  이처럼 세밀하게 분화된 목소리는 전시관의 마지막에서 하나의 비디오아트 콜라주로 표현돼있었다. 비디오는 서로 붙어 있으면서도 다른 목소리를 냈고, 서로 다른 목소리들은 하나의 움직임을 이루고 있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테니스 경기를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세레나 윌리엄스, 비너스 윌리엄스 자매의 미소,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경찰의 가혹행위를 반대하던 시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연설. 각 장면이 비디오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낱낱의 비디오들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섬세하고, 또렷한 시선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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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아트는 2000년대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 각각의 인사들 뿐 아니라 사회운동 'Black Lives Matter', 카트리나 허리케인과 9.11 테러와 같은 국가적 재난까지 포괄적으로 다루며 연대의 움직임을 이루고 있다.

  계단을 하나하나 눌러 밟으며 지상 1층으로 올라왔다. 나무뿌리보다 깊고 어두웠던 지하 3층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는 시작됐다. 지하 2층에서 그들은 '평범한' 시민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꼿꼿한 새순을 피워냈고, 지하 1층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로 가지를 뻗쳤다. 그리고 도달한 곳은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 지상이었다. 몇 시간만에 다시 마주한 지상의 땅은 영광스런 성취들로 빛나는 것 같다가도, 수많은 희생들로 가까스로 지탱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박물관의 개관식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의 시 구절을 인용했다. "나 또한, 미국인입니다(I, too, am America)." 기자는 고개를 숙였다. 발아래 자리한, 언제나 미국인이었지만 자신들이 똑같은 미국인임을 끊임없이 외쳐야했던 이들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마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