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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빛나는 민주주의의 빛, 4·19 열사들을 기억하다 부패권력을 몰아낸 학생들의 순수한 분노
등록일 2017.04.19 08:25l최종 업데이트 2017.04.19 11:28l 박주평 기자(pjppjp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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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4월 19일 고순자(미대), 김치호(문리대), 박동훈(법대), 손중근(사범대), 유재식(사범대), 안승준(상대), 6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경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는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도, 교수가 되기를 꿈꾸던 문학청년도, 고등고시를 준비하던 법대 학생도 있었다. 부패한 절대권력에 항거했던 그들의 순수한 분노는 두레문예관(67동) 앞뜰 4·19 공원에서 기억되고 있다. 이제는 희미해진 4·19 열사들의 발자취를, 마지막 연재를 맞는 ‘민주화의 길을 걷다’에서 따라 걸었다.



4·19 혁명의 중심에서 타오른 학생들의 함성


  부패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은 시작부터 끝까지 학생들의 힘으로 이뤄낸 혁명이었다. 3.15 선거를 앞두고 있던 자유당 정권은 야당세가 강하던 대구 지역에서 민주당이 지지세력을 모으지 못하도록 민주당 유세당일인 2월 28일(일요일), 학교 일선에 학생들을 등교시키도록 지시했다. 이에 반발한 대구 각 지역의 고등학생 수백여 명은 가두시위에 나서는 등 자유당의 횡포에 저항했다. 경북고등학교의 선언문에는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라는 내용이 담겼다.


  3.15 부정선거에 항거했던 마산의거의 주역 역시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야당 참관인들을 퇴장시킨 채 공개적인 부정투표를 자행했고, 민주당 간부 30여 명은 마산 시내에서 의거를 감행했다.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그 뒤를 따랐고 오후 7시 경에는 만여 명이 모여 “부정선거를 즉시 정지하라!”라고 외치며 시청으로 행진했다. 경찰은 의거행렬에 총격을 가했고, 최루탄까지 발사했다. 그 결과 8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행방불명된 김주열의 시체가 4월 11일 중앙동 해안에서 발견되며 마산은 들끓어 올랐고, 제2차 마산의거에서는 “살인범을 잡아내라!”, “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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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로 행진하고 있는 시위행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마산의거의 배후로 공산당을 지목하고 부정선거와 시민들의 사상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은 이승만의 행태는 결국 대학생들이 혁명의 주체로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대 학생들은 문리대 학생들의 주도 아래 4월 21일을 시위일자로 정하고, 15일부터 의견을 모아 선언문과 격문, 구호 등을 작성하는 등 준비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고려대 학생들이 18일 오후 1시에 시위를 감행했고, 이에 맞춰 전체 시위 날짜도 19일로 앞당겨졌다. 19일 아침부터 자유당 정권에 분노해 쏟아져 나온 인파가 거리에 가득 한 상황에서 서울대 학생들이 대오를 갖춰 국회의사당까지 평화행진을 한다는 계획은 무의미했다. 문리대를 비롯해 공대와 미대 등 각 단과대의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드높았고 분노로 들끓었던 4월 19일의 서울 거리는 결국 수백 명의 피로 뒤덮였고, 그 피는 자유당 정권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냈다.



“모든 허위를 버리자!”, 청년들의 고뇌와 열정


  4·19 청년 열사들의 흔적은 57년의 세월이 지나 옅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 맑은 숨을 쉬고 있었다. 희생된 6명의 열사 중 ‘4·19혁명희생자 유족회’를 통해 故박동훈, 故손중근, 故안승준 열사의 유족 및 친지와 연락이 닿았다.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서 걸어 나온 세 명의 열사는 불의에 분노하고, 미래를 고민하던 청년들이었다.


  박동훈 열사의 동생 박동수 씨는 스무 살 나이에 세상을 등진 형님을 강직하고 속 깊은 ‘어른’으로 기억했다. 교사의 박봉으로 힘겹게 7남매를 키우던 집안에서 혼자 힘으로 법대에 진학한 박동훈 열사는 가족 전체의 자랑이었다.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불의에 민감했던 열사는 경복고 3학년 재학시절 학생들을 불성실하게 지도하던 담임을 교체해달라고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경복고 교감으로 재직하던 열사의 아버지는 교장실에 불려가 “(박동훈 열사가) 빨갱이니까 집에 데려가라”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강단 있던 박동훈 열사는 1960년 4월에 입학한 후, 보름 남짓 대학생으로 살다가 영원히 잠들었다.


  박동수 씨는 4월 19일 자정이 넘어 들린 어머니의 울음소리로 형의 죽음을 알았다. 열사의 아버지가 오후 4시경 서북시립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을 받을 때까지, 가족 누구도 열사가 18일 고대생 시위에 동참했고 19일에도 광장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전염병 전문병원이던 서북시립병원은 적당한 처치를 하지 못했고, 수도의과병원(현 고려대병원)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했다. 그러나 수도의과병원에서는 수술 능력이 없다며 집도를 거부했다. 결국 8시가 넘어 국립의료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피를 많이 흘린 박동훈 열사는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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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앞으로 군중이 모이고 있다. ⓒ4·19혁명기념도서관



  열사의 죽음은 가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애주가이던 열사의 아버지는 4·19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 7남매 걱정에 금주를 결심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이 남긴 공허함을 술로 달래려 했는지, 4·19 혁명 1주기가 되던 날 망우리 공원묘지에서 통곡을 하고 돌아온 저녁부터 다시 술을 마셨다. 4·19 당시 15살이던 박동수 씨는 때때로 밥상에서 형의 밥그릇 하나가 없는 걸 볼 때 허전함을 느꼈다. 박 씨는 그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에, 유신통치와 80년대 군사정권을 겪으며 ‘형은 바보야. 왜 죽었어. 뭐가 달라지냔 말이지’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자유당 정권이 쏜 총탄은 막둥이를 천금같이 아끼던 형의 가슴에도 상흔을 남겼다. 손중근 열사는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 낳은, 5형제 중 막내였다. 열사보다 다섯 살 위인 형 손중서 씨는 동생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해 밥상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손 씨는 1957년 온 가족이 라디오 앞에 모여 서울대 합격자 발표를 들을 때, ‘손중근’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모두가 침묵했다고 기억했다. 대전에서 농사를 짓던 가난한 집안에서 등록금과 수업료를 마련할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님은 논 세 마지기를 팔아 아들을 대학에 보냈다.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한 손중근 열사는 불의에 물러서지 않는 문학청년이었다. 열사의 형수이자 손중서 씨의 배우자인 김자순 씨는 3.15 부정선거 당시 손중근 열사를 회고했다. 김 씨는 “우리 시동생이 한 표 찍겠다고 동사무소를 가니까 명부에 이름이 없어. 그래서 ‘내가 대전 사람이라 투표하러 왔는데 왜 없냐’ 항의했는데 투표를 못했지. 투표 못한 동네 사람들 있는지 다 조사하고 다녔어. 그리고 서울로 올라간 거야”라고 기억했다. 손 열사가 남긴 1958년 2월 26일자 일기에는 “모든 허위를 버리자! 백지로 돌아가자! 나를 불태우자. 백지. 그 위에 주춧돌부터 쌓아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4월 19일, 공군 대위였던 손중서 씨는 대방동 공군회관에서 교육을 받던 중 손중근 열사의 친구인 신철수 씨에게 연락을 받았다. 손 씨는 “경복궁에서 경무대로 가는데 경찰이 앞에서 막고 총을 쏘더래. 등허리에 맞은 총알이 가슴에 구멍을 뚫고 나갔어. 그 자리에서 ‘철수야, 살려줘’, 그러고 죽었대. 서로 떠밀고 쓰러지고 해서 시체도 못 찾을 뻔했는데 철수가 등에 업고 병원에 갔지”라고 전해들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자순 씨는 “성격은 명랑했지. 아버지는 일 못하게 자기가 소 끌고 나가서 풀 먹이고, 풀베고. 아주 참 효자였어. 이 양반은 봉안소 가면 아직도 울어, 가슴으로 울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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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중근 열사의 친구들이 열사가 생전에 썼던 일기, 편지, 시, 소설 등을 모아 펴낸 유고집

ⓒ최한종 사진기자



  안승준 열사와 4·19 혁명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허국광 씨는 그날을 고통스럽게 기억했다. 허 씨는 안승준 열사와 서울중, 서울고 동창인 가장 친한 친구였고, 고려대 법대로 진학한 이후에도 자주 어울렸다. 두 친구는 고등고시를 보기 위해 평택에 있는 운수암에서 같이 공부하기도 했다. 시험을 접수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때가 1960년 4월이었다. 허국광 씨는 지금은 좀 무뎌졌지만 4·19 혁명 이후 절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던 때처럼 매 순간순간이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결국 허 씨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시험을 포기했다.


  허국광 씨는 안승준 열사를 “내성적이지만 마음이 깨끗하고 곧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허 씨는 안 열사가 평소 신문을 많이 읽었고, 특히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군의 사망사건에 분노했다고 말했다. 두 친구는 시험을 준비하던 시기임에도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있었던 고대생 시위에 동참했고, 19일에는 서대문에 살던 안승준 열사가 아침 8시부터 마포종점에 있던 허국광 씨의 집에 찾아와 데모를 가자고 제안했다. 허 씨의 출발이 늦어지자 안 열사는 먼저 출발했고, 둘은 나중에 광화문에서 합류했다. 그러나 총탄과 비명이 난무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두 친구는 헤어졌고, 허국광 씨가 안 열사를 다시 만난 곳은 서울대병원 영안실이었다. 안 열사는 머리와 가슴에 관통상을 입은 채였다.



1960년과 2017년, 민주주의의 길


  남겨진 자들은 4·19 혁명이 실패한 혁명이라는 일부의 평가를 비판하며 4·19 혁명은 학생의 힘으로 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박동수 씨는 “당시 정보가 차단된 폐쇄사회에서 위정자가 민중을 억압할 때, 학생들은 양식이 있었다. 전혀 조직되지 않은 상황에서 순수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라고 평가했다. 허국광 씨 역시 “(학생들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투철하게 실천했는데 뭐가 실패냐. 정치에 욕심이 있었다면 (이승만이 물러난 후에도) 학생들이 주도했겠지만 순수하다보니 그러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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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리과대학이 4.19 정신을 간직하고자 1961년 4월 19일 건립한 4.19 학생혁명기념탑

ⓒ최한종 사진기자



  4·19 혁명과 희생자 유족들을 대하는 그 동안의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김자순 씨는 “정부에서 4·19 혁명 기념식에 초청받은 지가 5년 됐다. 그동안 희생자의 직계 비속은 안 되고 존속만 유족으로 인정됐다”라고 서러움을 토로했다. 또 김 씨는 “4·19 혁명을 의거라고 할 때도 참 속상하더라. 김영삼 대통령이 4·19를 혁명이라고 해준 것만도 고맙다”라고 말했다. 4.19가 ‘정의를 위해 도모한 일’에 그치지 않고 자유당 정권의 악습과 잘못된 사회구조를 뒤집은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허국광 씨 역시 “(군사정권에서는) 4·19를 추모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라고 비판했다. 헌법전문에 4·19 정신이 건국이념으로 명시되기까지, 의거가 아닌 혁명으로 불리기까지, 유족들이 마땅한 대우를 받기까지 험난한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2007년, 6월 항쟁 20주년과 학내에 산재된 추모비들을 정리할 필요성이 맞물려 민주화의 길이 추진됐고 <서울대저널>은 2014년 제128호부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현재의 기억으로 다가가”고자 ‘민주화의 길을 걷다’를 연재했다. ‘민주화의 길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조흥식 교수(사회복지학과)는 “4·19가 민주화의 물꼬를 텄고, 그것이 87년 6월 항쟁으로 열매를 맺었다”라고 말했다. 또 조 교수는 “‘민주화의 길을 걷다’는 필요하고 시의적절한 연재였다”라며 “올해 6월 항쟁 30주년을 맞이해 (우리 사회가) 내용적으로도 민주화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서울대저널>이 방향을 제시하는 기사를 쓰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증명하듯 시민의 힘으로 다시 부패권력을 몰아낸 2017년, 민주주의의 씨앗을 처음 뿌린 4·19 혁명의 정신과 군사정권 아래에서 죽어간 열사들의 넋을 어떻게 기리고 이어갈 것인가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문리대 학생회‘4월 혁명 제1선언문’ 중(中))


  기사에서 다뤄진 4·19 혁명 전개과정은 《4월 학생민주혁명 : 배경·과정·영향》(김성주·강석승 편저, 2013)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