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호 > 특집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그을린 길 목록에 오른 9,473명, 구속된 6명, 가려지지 않는 차별의 흔적
등록일 2017.04.25 14:19l최종 업데이트 2017.06.09 16:31l 송재인 기자(gooay@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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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지난해 가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정권 퇴진을 외친 결과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파면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부가 정치적 성향을 기준으로 문화예술인들을 분류, ‘편향된’ 문화예술인을 대상으로 기금지원 배제를 시도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태’는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고위 관계자를 비롯한 블랙리스트 책임자는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을 회피한 채 사퇴했고, 정권 교체의 국면에 들어서서 책임 소재도 불분명해졌다. 이에 문화예술인들은 계속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문화농단’이라 불리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던 블랙리스트 사태는 언제부터, 어떻게 흘러왔을까.



블랙리스트, 심판대에 오르기까지


  소문만 무성했던 ‘블랙리스트’의 실체는 지난해 10월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10월 10일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은 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 회의록을 공개하며 9,473명의 문화예술인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폭로했다. 이틀 뒤인 12일 <한국일보>는 청와대가 작성해 문체부로 내려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블랙리스트 문건을 보도했다. 해당 문건에는 9,473 명의 문화예술인이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세월호 시국 선언’, ‘문재인 후보지지 선언’, ‘박원순 후보지지 선언’의 네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조윤선 당시 문체부 장관은 곧바로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부인했지만 조 전 장관의 거짓말은 금방 탄로 났다. 지난해 12월 26일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했다고 증언했으며, 故김영한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청와대가 블랙리스트 작성에 개입했음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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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 존재 자체를 부인하던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모습은 전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YTN


  박영수 특검팀은 지난해 12월 26일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 부 장관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며 본격 수사를 시작했다. 수사결과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 전 비서실장의 발언이 블랙리스트 사태를 촉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2013년 8월과 9월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들은 “문화예술계가 좌편향 돼있다”라고 언급했다. 특히 김 전 비서실장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 정권 초기에 바로잡아야한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김 전 비서실장의 지시로 문체부는 ‘건전콘텐츠 TF’ 등을 조직해 정부의 시민사회단체 지원 실태를 전수조사했다. 박준우 전 정무수석과 신동철 전 국민소통비서관도 2014년 4월 ‘민간단체보조금 TF’를 운영하며 블랙리스트 작업을 현실화했다. 작성된 블랙리스트 문건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으며 같은 해 6월 블랙리스트 사업은 신임 정무수석인 조 전 장관에게 인수인계됐다. 이후 블랙리스트 명단은 2015년 5월 약 1만 명까지 확대됐다.



헌정유린 블랙리스트, 공직사회 문화부터 개선돼야


  지난 1월 20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블랙리스트가 불법인 줄 몰랐다”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고려대 이준일 교수(법학전문대학원)에 따르면 블랙리스트 사태는 사찰, 검열, 차별의 세 가지 쟁점에서 명백히 위법하다. 그는 “헌법 조항 중 ‘주거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통신의 비밀’을 종합했을 때 국가는 국민의 ‘감시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라며 “블랙리스트는 이를 침해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블랙리스트는 정부 지원을 매개로 문화예술가가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간접검열에 해당한다”라고 강조했다. 직접검열의 형식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직접검열의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블랙리스트를 기준으로 정부지원 여부를 결정한 것 역시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에 위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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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3일 송수근 문체부 장관 직무대행 등 문체부 간부들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했다. ⓒ한겨레


  한편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해결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블랙리스트에 깊이 관여한 박근혜 전 대통령 포함 전현직 고위공직자 6명이 현재 구속된 상태지만 진심 어린 반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1월 21일 박 전 대통령 측은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바 없다고 주장했으며 23일 문체부가 발표한 대국민 사과문에는 구체적인 작성 경위와 책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또한 송수근 문체부 장관 직무대행은 지난해 ‘건전콘텐츠 TF’ 팀장을 맡아 블랙리스트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해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 (법학부)는 “형법절차와 제도개선으로는 블랙리스트 사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제도가 어떻게 수정되든 사업 지원을 결정하는 각종 위원회 구성원의 상당수는 청와대나 여당이 지명하게 된다”라며 제도개선만으로는 위원회가 온전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갖추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블랙리스트의 재발만 막는 것에 집중할게 아니라, 블랙리스트로 대변되는 각종 부당한 정치개입과 차별들을 예방하는 것으로 관심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본질적 해결을 위해선 공직사회 내 차별에 대한 인식이 제고돼야 한다”라고 강조하며 차별에 대한 감수성과 역량 강화를 제시했다.



블랙리스트, 예술에 가한 검은 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