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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서 공동체로 국립현대미술관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展
등록일 2017.09.03 22:57l최종 업데이트 2017.09.14 12:47l 허유진 기자(qq877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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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사진가이며, 산업 디자이너이며, 미디어 아티스트이며, 비평가이며, 역사가이고,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중 하나는 아닙니다.” 폴란드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크지슈토프 보디츠코는 예술을 매개로 사회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이와 같은 예술관은 생의 대부분을 타국에서 체류증을 받으며 생활한 그의 이력에서 유래한다. 그가 활동할 당시 폴란드는 강력한 국가사회주의를 유지했기 때문에 작품 활동에 제약이 컸고, 그는 자유를 찾아 고국을 떠났다. 이후 일생 동안 스스로를 이방인의 위치에 놓았던 보디츠코는 세계 각지에서 상처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는 예술을 했다. 이번 전시 역시 노숙자, 난민, 이주민 등의 발언을 되찾고, 공동체를 복원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를 보여준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보디츠코의 예술관에 맞게, 전시 설명을 담은 오디오 가이드는 탈북 성악가 김가영과 인도적 난민 지위의 탄자니아 출신 재클린이 맡았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한데 모인 ‘기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보디츠코는 사회적 약자가 차별과 부당함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구’를 만들고, 이를 ‘문화적 보철기구’로 명명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이 문화적 보철 기구를 통해 '파르헤지아(Parrhesia, 자유로운 발화)'를 실천하고, 공동체의 진정한 일원으로 존중받기를 기대한다.


  그중 ‘노숙자 수레’는 노숙자 문제에 관심을 촉발하기 위해 제작된 기구다. 부동산 광풍이 불던 80년대 말 뉴욕, 세입자를 기다리는 텅 빈 빌딩들 가운데 역설적이게도 노숙자들은 폐타이어를 태우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보디츠코는 이를 목격하고 쇼핑카트를 개조해 노숙자 수레를 만들었다. 노숙자들은 이 기구 안에서 잠을 자거나, 세수를 하고, 깡통이나 빈 병을 보관하기도 했다. 수레가 길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은 카트의 생김새에 관심을 갖고 다가와 노 숙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노숙자들은 수레를 통해 행인들과 소통하며 도시 공동체에 참여하게 됐고, 행인들은 수레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함께 고민했다. 보디츠코는 “도시의 열악한 생존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이 발전하고, 결국 노숙자 수레가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 작품의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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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숙인이 뉴욕 트럼프 타워 앞에서 노숙자 수레를 시연 중인 모습 (1988, 홍콩 개인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보디츠코는 도시 공동체 속 또 다른 ‘타자’인 이주민에도 관심을 가졌다. 타국을 떠돌며 생활해 이주민의 상황에 각별히 공감하던 작가는 이주민을 위해 ‘외국인 지팡이’를 제작했다. 외국인 지팡이는 가운데에 이주와 관련된 물건을 넣고, 윗부분에 이를 설명해주는 영상이 재생되도록 디자인됐다. 지팡이의 낯선 생김새는 행인들의 이목을 끌었고, 행인들은 이 지팡이의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이에 이주민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물건을 행인들에게 설명하거나, 이민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대화는 사적 경험과 의견을 나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주민이 도시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보디츠코는 외국인 지팡이를 통해 진심 어린 소통이 타자와 ‘우리’ 사이의 경계를 허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자유로운 발화를 통한 공동체의 회복을 바랐던 보디츠코의 시선은 한국으로 이동한다. 2016년 12월, 보디츠코는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이상적인 국가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인간적인 삶의 조건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야말로 발화가 쏟아져 나온 겨울이었다. 억압과 차별을 겪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은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 ‘나의 소원’을 제작했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백범 김구를 선정했다. 그는 백범의 글  <나의 소원>을 읽고 백범이 꿈꾸던 나라를 “다양한 정치적 생각, 이념, 문화를 위한 여유, 유혈의 대치 없이도 다른 의견이 존재할 여지가 있는 나라”로 이 해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 가는 조국을 꿈꾸던 백범의 동상에 각기 다른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입혀 만든 작품이 바로 나의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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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원' 중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준영이 엄마가 아들의 유품을 들고 발언하는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나의 소원에서는 13명의 화자가 40여 분에 걸쳐 각각 자신의 소원에 대해 말한다. 백범의 얼굴과 손발 위에 13명의 신체가 차례로 투사되고,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한국 사회에서 겪은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긴 시간 해고노동자로 거리에 섰던 노동자,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 탈북 래퍼, 방글라데시에서 귀화한 영화배우, 동성애 인권 운동가, 2년제 대학의 학생…. 목소리의 색과 높낮이가 제각각인 만큼, 그들의 소원도 다양하다. 이주민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 분단을 다시 하나로 회복한 나라, 소수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 꿈꿀 수 있는 사회, 사람 목숨이 소중한 나라, 나답게 살 수 있 는 사회, 출발선이 평등한 사회. 이들이 바라는 사회상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민주적인 사회로 수렴된다.


  관람객들은 작품 속 인물들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며, 미술관은 서로가 소통하는 공론장이 된다. 작가는 “우리는 결코 타인의 고통의 깊이에 가닿을 수 는 없지만, 타인의 고통에 귀를 기울일 수는 있으며, 또한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보디츠코는 발화와 경청을 통해 공공의 영역으로 변모한 공간에서, 다양한 목소리의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디자인은 소통을 위한 첫걸음이 돼, ‘타자’들이 가득한 도시가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공동체가 되도록 돕는다. 지난해 겨울 수많은 촛불이 희망을 수놓았음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나의 소원을 통해 보디츠코는 한국의 수많은 공간이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展
기간  17.07.05 ~ 17.10.09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제5, 제7전시실

관람료  4000원(대학생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