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호 > 기고·칼럼 >학술기고
야민정음, 발랄한 문자 놀이
등록일 2017.09.04 16:09l최종 업데이트 2017.09.20 03:28l 박진호 교수(국어국문학과)

조회 수:22844

  '우리 이니 머통령 커엽다’, ‘박ᄅ혜 보니 괴꺼솟, 젊은이들 사이에서 소위 야민정음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개의 글자 A, B가 모양이 비슷하여 글자 크기가 작을 때 혼동될 수 있는 경우, 옳은 글자 대신 B를 쓰는 것이다이런 현상에 대해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은한글 파괴라거나세종대왕이 격노하여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언어나 문자뿐 아니라 문화현상, 사회현상 전반에 대해 변화와 혁신을 자유롭게 꿈꾸고 실천하는 사람과 기성의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이런 현상에 대해 어떤 태도나 견해를 섣부르게 가지기보다는,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사회문화적 배경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다른 나라나 다른 시기의 비슷한 사례로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하면이 현상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있게 될 수도 있고이 현상을 즐길 수 있게  수 있다.


  야민정음과 약간 비슷한 현상이 한글이 창제된 직후에도 있었다. 야민정음의 사례 중 글자의 90도 또는 180도 회전에 바탕을 둔 것들이 있다. ‘비버~뜨또’, ‘육군~곤뇽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글이 창제된 직후에 한글로 된 책을 펴내기 위해 한글 활자를 만들었고, 활자를 가지고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같은 책을 찍어내기도 했다. 활자는 페이지를 인쇄하고 나면 활판을 해체하여 활자를 재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렇지만 한 페이지 안에서 같은 글자가 여러 번 쓰일 수 있으므로, 자주 쓰이는 글자는 활자를 여러 개 만들어야 한다반면에 드물게 쓰이는 글자는 활자를 한두 개만 만들면 된다. 드물게 쓰일 거라고 생각되어 활자를 개만 만들었는데, 의외로 한 페이지에서 이 글자가 두 번 이상 나오면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예컨대이라는 글자의 활자를 1개만 만들었는데 페이지에 두 번 나온다고 치자이 때 활판 인쇄를 담당했던 사람이 기지를 발휘하여, 둘 중 한군데는 ’ 활자를 180도 돌려서 사용한 것이다. ‘’ 활자를 새로 1 더 주조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경제적인 해결책이었다. 오늘날 자금 부족으로 쪼달리는 작은 회사에서 어느 사원이 이런 식의 해결책을 내서 회사 돈을 절약하게 됐다면 사장으로서는 사원을 업어 주고 싶을 것이다. ‘과 의 이런 관계를 이용한 수수께끼도 있다. 산길을 가다가 곰을 만났는데 어떻게 피했을까? 물구나무서기를 해서 곰이 문이 되어 그 문으로 빠져나왔다는 식이다.

  

  ‘처럼 글자 모양의 유사성 때문에 생긴 국어학계의 논란도 있다. ‘석보상절등의 몇몇 문헌에ᄀᆞᆮ’( 음절: 기역, 아래아, 디귿)라는 어형이 몇 번 나오는데 그 형태도 특이하고 의미도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워서 학자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어느 젊은 학자가 이 어형이 ᄀᆞᆮ 아니라곤가’(첫음절: 기역, , 니은)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같은 문헌에서ᄀᆞᆮ’임이 분명한 다른 글자와 세밀하게 비교한 결과 모양이 다르고 오히려 비슷하다는 것이다. ‘곤가라고 해도 어형이 어떻게 해서 형성된 것인지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ᄀᆞᆮ라고 보았을 때에 비해서는 수수께끼가 일부 해결되었기 때문에, 학계에서 호평을 받았다. 국어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중세국어 야민정음 논쟁이라고 만하다.


  한글에 비해 글자가 훨씬 더 많은 한자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야민정음과 비슷한 발상법에 바탕을 둔 글자사이의 혼동과 통용이 엄청나게 많다. 재방변과 나무목변은 하나 차이인데 목판에 새겨 놓으면 모양이 더 비슷하여 이 둘이 왔다갔다 하는 일은 고문헌에서 부지기수이다. ‘( ), ‘(이미 )’, ‘( )’ 획이 붙고 붙고의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이어서 흔하게 통용된다. 자형상으로는 구분이 되지만 문맥을 보면 어느 글자인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큰 혼동은 야기되지 않는다.


  위의 예는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자형상의 미세한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인데, 한자들 사이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이용하여 비틀어서 사용한 재미있는 사례들도 매우 많다. 일본에서 특히 이런 현상이 발달하여 れ書き(다와무레가키)’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엽집’ 같은 데서 특히 많이 사용되었다. 숫자 99 나타내기 위해 ( )’자를 쓰는 것이 유명한 예이다. ‘(일백 )’에서 획 하나를 뺐으니 99 된다는 논리이다. 고전 일본어에서 “(밖으로) 나가 의미하는 동사 활용형イデ(이데)’ 표기하기 위해서는 한자 쓰는 것이 보통인데, 이때 대신山上復有山이라고 사례가 있다. ‘자의 모양을 분석해 보면자 위에 또 자가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한자와 일본어 사이의 대응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사례들도 있다. 고전일본어의 조사 かも(카모)’라는 것이 있는데오리 의미하는 명사かも 동음이의어이다. 그런데 조사かも 써야 자리에이나青頭鶏라고 경우가 있다. ‘이나青頭鶏 오리를 가리키는데 오리를 의미하는 일본어 단어가かも이고 단어와 조사かも 동음이의어라는 식으로 번의 추리를 거치면 필자가 의도한 단어에 도달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이런 식의 언어유희, 문자유희를 매우 즐겼던 듯하다. 이런 유희가 일본문화를 더 풍성하게 하고 더 매력적이게끔 만들었다는데 많 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그러고 보면 요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야민정음 같은 것도 우리 문화를 더 다채롭고 발랄하게 해주는 고마운 현상이라고 만하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 때 야민정음 식의 사용을 염두에 두었을 것 같지는 않으나그렇다고 해서 야민정음을 보고 꼭 분노했을 것 같지도 않다. ‘아니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방식으로 한글을 쓰다니. 요즘 녀석들 아이디어가 톡톡 튀는데.’ 하며 껄껄 웃으실지도 모르겠다. 세종이 야민정음에 대해 마음 불편하게 여긴다고 해도 어떤가? 모든 문화적 창조물은 창조자의 손을 떠나면 창조자의 의도와 다르게 사용되고 향유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창조물의 용도를 창조자의 생각의 한계에 가둬둘 이유가 있겠는가? 게다가 젊은이들은 야민정음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많다. 기성세대 꼰대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니 꼰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즐겁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부러우면 지는거고, 아니꼬우면 출세하라고 했다. 젊은이들끼리 이러는 아프면, 꼰대들끼리도 그런 발랄한 소통 수단을 만들면 된다. 나이와 계층을 넘어서 한글이 자유롭고 발랄하게 활용되고 변형되어 의사소통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를 바란다.


박진호 교수님.jpeg

박진호 교수(국어국문학과) 

서울대 국문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한양대를 거쳐 2009년부터 서울대에 재직하고 있다. 한국어 문법론이 주전공으로서, 일본어, 중국어 등의 이웃 언어는 물론 세계의 많은 언어들과의 비교를 통해 한국어의 문법적 특질을 밝히는 데 연구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 고려시대 구결자료를 바탕으로 한 한국어 문법사 연구, 한국어 정보 처리 등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