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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서 남자로', 그리고 여자아이돌과 '로리타'에 관하여
등록일 2017.09.06 14:52l최종 업데이트 2017.09.11 15:27l 길지민(사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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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하기에 앞서, 의도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로리타 콤플렉스를 연상시켜 활동하는 문화콘텐츠 생산자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로리타 콤플렉스’가 대중적인 문화 코드로 공유되는 현상은 그 자체로 문제적이다. 일명 ‘로리타 클리셰(cliché)’가 아동 대상 성범죄율과 무관하다거나, 로리타 콤플렉스를 소비하는 문화가 오랜 시간 추방 되지 않았을 때 대상화되는 미성년자의 연령대가 점진적으로 낮아져 결국 성인 잡지에 유치원복이 등장할 것이라는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상관없다. 이는 내가 아닌 타인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이며, 아동이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이미지를 착취하는 일이다. 자동차 광고에서 빨간 미니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을 이유 없이 클로즈업하는 것처럼, 간호사들이 입지 않는 해괴한 간호사복을 섹슈얼한 판타지의 대상으로 삼는 것처럼 말이다. 연출 과정에 개입된 모든 이들은 사태의 심각성과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 제기를 받은 아이돌들 중 다수가 ‘마이웨이(my-way)'를 택한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로리타 콤플렉스 컨셉을 생산하고 재생산해온 아이돌은 어떠한 주체성의 표상도 될 수 없다. 이들은 타인의 이미지를 왜곡하는 일에 의존한 채로 온연한 자아의 표출을 가장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내가 감사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만, 나의 아이돌에게는 ‘로리타’ 논란이 없다. 수험생 시절 한 신인 아이돌 그룹에게 우연히 ‘치었다’가 그들이 톱스타가 되는 것을 보기까지 그들은 내 기억 속에서 한 번도 로리타 콤플렉스와 관련한 컨셉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나의 덕질은 꽤 무사하지만, 이 지점에서 특별히 안도하지는 않는다. 사실 거의 모든 남자아이돌은 이 논란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연예기획사 소속의 여자아이돌은 다르다. 그들은 의상, 춤, 가사 등 아이돌 가수로서 표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로리타 콤플렉스를 연상시킨다고 비판받고 있다. 이들에게 국한된 것만이 아니다. 2017년의 여자아이돌 중 대부분은 한 번쯤 ‘로리타’ 의혹을 제기 받은 경험이 있다. 나른한 표정으로 젖병을 문 채 찍은 화보나 배꼽이 보이도록 짧게 제작한 교복 형태의 무대 의상, 또는 단순히 양갈래로 땋은 머리 위에 놓여있는 노란 색 모자에 이르기까지,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는 다양하다. 어떤 팬들은 이것이 오해라며 설명하고, 누군가는 사과를 요구한다. 논란 발생을 기점으로 ‘탈덕’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 상황에 대해서 안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아이돌은 ‘로리타’ 안 해서, 로리타 하는 애들이랑 안 놀아서 다행이다, 라면서. 특히 남자아이돌의 경우에는, 그 들이 공식 석상에서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하지 않을까 불안해 할지언정 ‘로리타’ 논란에 크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남자아이돌에게 로리타 논란은 없다. 간혹 반바지를 입고 멜빵을 맨 화보가 ‘쇼타콤’(‘로리타’ 와 ‘쇼타’를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므로 이 글에서는 아동에 대한 성도착증과 관련 페티시즘 및 문화적 코드를 모두 ‘로리타’ 내지는 ‘로리타 콤플렉스’로 칭한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글이 작성되기는 하지만, 앞서 제시한 여자아이돌의 사례에 비하면 현저히 적다. 게다가 사람들은 큰 관심이 없다. 이러한 문제 제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 더라도 대부분은 엄밀하거나 엄밀해 보이는 논리를 통해 아주 쉽게 ‘해명된다.’ 작은 논란은 주로 ‘해당 이미지는 아직 자아 탐색 과정에 있는 소년으로서의 사랑 추구라는 함의를 지닌다는 맥락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아동의 성적 대상화와는 관련이 없다’는 설명으로 종결된다. 그것이 타당하건 타당하지 않건, 여자아이돌이 일명 ‘클리셰'에 해당하는 자세를 취했다는 이유만으로 도마에 오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로리타를 한다’라거나 ‘로리타다’라는 비문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곁에 두고서라도, 미심쩍은 점은 한두 개가 아니다. 성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교복을 입어선 안 되는가? 립스틱이 번져있으면,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안되는 건가? 마린 룩은 ‘로리타’가 아니고 세라복은 ‘로리타’인가? 폭력적인 검열과 광범위한 낙 인 찍기가 ‘아동에 대한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행된다. 이는 어떤 이미지가 로리타 콤플렉스적 코드로써 자주 사용된다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진다. 앞서 강조했듯이, 로리타 콤플렉스를 자극하려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착취를 통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전히 가장 이상한 점은 일반적으로 여자아이돌만이 ‘로리타’를 둘러싼 폭력의 당사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아이돌은 이와 같은 폭력에 있어 적극적인 가해자와 방관자이기도 하지만, 소극적인 수용자이기도 하고, 제작 과정과 대중에 의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들이 왜 자꾸 ‘로리타’ 컨셉을 이용하고, 끊임없이 해명을 요구받는지에 관한 질문은 아이돌의 섹슈얼리티와 연관된 복잡한 문제다. 아이돌의 정체성에서 구현되는 젠더 현상은 일상적인 것 과는 차이가 있다. 2017년의 한국에서 아이돌은 우상이라기보다는 ‘대상’으로 보인다. 연예계의 성접대 논란과 방송에서의 성희롱과 성추행, 그리고 팬싸인회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을 무시한 채 강요되는 신체 접촉이 목격된다. 특정 신체 부위를 확대한 움짤과 이를 두고 벌어지는 음담패설, 그리고 팬덤의 문화로 자리잡아버린 ‘수위썰’들과 외설적인 세계관이 목격된다. 연애를 하고 SNS에 이를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동안 내가 너에게 바친 돈을 뱉어내라”며 남겨지는 폭력적인 댓글들이 목격된다. 정당한 노동을 통해 얻은 수입이 유사 연애를 통해 받은 용돈처럼 취급된다. 아이돌의 세계에서도 젠더 차이는 나타난다. 방송에서 여자아이돌의 성(性)이 더욱 보호받지 못한다는 관점은 비교적 다수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남자 아이돌이 왜 특정한-수동적인-방식으로 대상화되지 않는가, 그리고 왜 남자 아이돌은 그와 같은 문제 제기에서 동떨어져 있는가에 관한 문제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결국 여자아이돌과 ‘로리타’ 문제는 아이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사회 전체적인 젠더 권력에 근원을 두고 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회에서 여성과 아이에게 각각 기대하는 행동 양식이 서로 너무나 가깝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 아이돌에게서 드러나는 로리타적 코드는 명확한데, 쇼핑몰 5-7세 코너에 진열되어 있을 법한 캐릭터 티셔츠를 입은 피사체를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구도에서 비춘 사진이 그렇다. ‘고분고분하기를’ 요구 받는 여성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매력으로부터, 얌전하지 않으면 혼이 나는 아이를 연상해내는 과정은 부자연스럽지 않다. 수동성을 적극적으로 극대화하는 모습은 모순적이지만, 수동성을 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모션이기도 하다. 다른 경우 아이돌의 특정한 행위가 로리타 콤플렉스를 내포하는지 아닌지에 관해서 논쟁이 일어난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 이것이 여성의 행위인지, 아동의 행위인지 분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본질적으로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애교는 여성의 것일까, 아이의 것일까? ‘나 꿍꼬또 기싱꿍꼬또’는 비교적 명확하지만, ‘오빠 아잉~’은 누구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남성 어른에게 허락을 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는 아이이기도, 여성이기도 하다. 남성 어른에 비해 어리숙해야 하는 이 역시 아이이기도, 여성이기도 하다. 애교 있고 귀여운 여자가 되면서도 아이와 자신을 분리해내라는 과제는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청순한, 섹시한, 자유분방한, 순정만화스러운, 귀티 나는, 지적인, 빈틈이 있는, 진지한, 활기찬, 무기력한 남자아이돌은 많고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다. 그러나 아무리 귀여운 연하남일지라도, 이들은 적극적이고, 누나를 너라고 부 르고, 소녀를 돌려세우고, 부끄럽더라도 마음을 전하고, 상대에게 다가가고 만다. 상대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더라도 이는 상황이나 개인적 특성에 의한 것이다. 그 누구의 망설임도 수동적인 젠더 역할에 기인하지는 않 는다. 많은 귀여운 여자들이 기 세지 않은 섹시한 여자가 되느라고 애쓰는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남자아이돌은 ‘소년에서 남자로’ 거듭난다. 소년은 수줍지만 선을 넘기 위해 용기를 내고, 남자는 성숙하고 완전해진다. 남자가 된 아이돌에게서 아이의 흔적을 찾을 이유는 없다. 뿐만 아니라, 소년에게서 로리타 콤플렉스 속 아동을 읽어내기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로리타 콤플렉스는 힘이 없고 무지한 아이상(像)을 제시한다. 그러나 니삭스를 신고 멜빵 반바지를 입더라도 이들은 여전히 연약하지 않다. 남자아이돌이 표현할 것으로 기대되는 소년은 대부분의 경우 로리타 콤플렉스의 시선에 갇혀있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거리가 먼 것만큼이나 남성과 아이는 멀리 떨어져 있다. 소년이 남성으로 성장하면서 이들 사이의 경계는 더욱 뚜렷해진다. 남자아이돌은 이미 주체적인 이가 주체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표방한다. 여기에 로리타 콤플렉스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소년이 남자가 되는 사이에 여성이 아이와 함께 머무르는 현상은 비단 아이돌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떠올려본다. 남성 근로자가 퇴근해 집에 돌아왔을 때 부엌장갑과 앞치마를 그대로 착용한 채로 달려 나와 그에게 키스하는 여성 주부, 그리고 깔깔 웃으며 달려오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는 남성이 있다. 또, 책으로 읽었던 <타이타닉>을 떠올려본다. 여자와 아이를 먼저 구하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두 텍스트는 근로하는 여 성 독자와 다른 사람을 구하는 여성 독자로 예상하지 않는다. 아마도 세상에 그런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식당과 카페에 입장하지도 못한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자신이 아닌 남자 어른의 시선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이해해야만 하는 삶을 산다. 며칠 전, 낙성대역 모 식당 벽 한쪽에 ‘술에 많이 취한 다음날은 침대에서 여자와 함께 일어나거나, 경찰 서에 가있다’는 내용의 글귀가 프린팅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소수자 지우기와 여성의 성적대상화 문제에 더해서, 왜 여자와 아이는 주어가 될 수 없는지, 왜 언제나 주어들의 시선으로 자신의 존재를 객체화해야만 하는 건지 우울한 의문이 남는다. 

  요컨대, 여자아이돌과 ‘로리타’ 문제에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을 수단화 하고 타자화하도록 두는 사회의 모습이 투영되어있다. 우리는 무감각하게 아이돌의 인격과 섹슈얼리티를 소비하고, 여성에게 순종과 미숙함을 요구하고, 어린이의 발언권을 제한하면서도 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지 않는다. 로리타 콤플렉스를 통해 아이들에게 부여되는 기괴한 이미지와 여성에게 주어지는 이상적인 상은 닮아있다. 로리타 콤플렉스 컨셉을 사용함으로써 여자아이돌들이 그들 자신에게 주어지는 대상화의 과제를 모호한 경계 위에서 수행한다. 이는 아이를 향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남자아이돌이 ‘소년에서 남자로’ 진화하는 동안 여자, 그리고 아이돌이 ‘로리타’ 하도록 내버려둔 것은 누구인가? 왜 우리는 대상화되고, 대상화하는 세상에 살아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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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민(사회 15) 원래 이름은 '지미니크리켓'이 될 뻔 했다. 싫어하는 것은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가 나한테 까부는 것. 최근 여행지는 이번 방학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이 뭔지 궁금해서 갔다 온 철원. 요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철원에서 모기 물린 자국이 일주일 째 가렵다는 사실. 현망진창될 만큼 재미있는 덕질거리가 생기지 않는 게 두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