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호 > 문화 >오감을 유지하자
몸은 기억한다, 그리고 말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사를 몸으로 쓰다'展
등록일 2017.12.02 16:28l최종 업데이트 2017.12.02 16:54l 송재인 기자(gooay@snu.ac.kr)

조회 수:13

  난해하고 다가가기 어렵다. 행위예술(Performance, 회화와 조각 등 작품이 아니라 신체를 이용해 표현하는 예술)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다. ‘역사를 몸으로 쓰다’ 전시는 이러한 거리감에 반기를 든다. 행위예술은 우리의 몸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녹아있을 수밖에 없고, 삶을 드러내는 몸의 예술은 현실과 동떨어진, 모호한 예술일 수 없다는 것이다. 총 3부로 이뤄진 전시는 1960년대 이후 예술가들이 몸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사회를 말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역사쓰기’에서 소외됐던 몸은 때론 발가벗겨져, 때론 집단이 되어 적극적으로 우리네 삶에 대해 말해왔다.

  1부 ‘집단 기억과 문화를 퍼포밍하다’에는 거대한 제도와 권력 아래 억압받았던 집단의 기억이 몸으로 표현돼있다. 오노 요코의 ‘컷 피스(Cut Piece,1964-1966)’ 공연 영상에서 작가는 가위를 앞에 두고 무대 위에 조용히 앉아있다. 관객은 “자르라(cut)”는 지시에 따라 한 명씩 무대로 올라와 작가의 옷을 가위로 자르고, 자른 조각(piece)을 가져간다. 관객들은 처음에는  조심스레 그녀의 겉옷 한 조각을 가져갈 뿐이지만, 이내 정도가 과감해진다. 결국 관객들은 재밌다는 얼굴로 작가의 내의 전부를 잘라간다. 시종일관 앞을 응시하며 초연한 얼굴을 유지하던 작가도 브래지어의 양 끈까지 잘려나가자, 초조히 눈을 굴리고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는 듯 보인다. 일본 태생의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일본 전후사회에 남아있던 대량학살의 기억과 인간의 잠재된 폭력성을 고발한다. 나아가 무력한 여성 작가의 신체를 폭력적으로 노출시키고 관음하는 관객들의 모습은 여성을 억압해온 가부장제의 역사를 여실히 보여준다.


1.png

▲ 요노 요코의 '컷 피스(Cut Piece)' 공연 영상 ⓒ국립현대미술관

 
  고이즈미 메이로의 ‘이것이 희극이다(2012)’ 또한 일본 전후사회에 남아있던 기억을 다루는 동시에,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거대한 제도 권력에 집중한다. 영상에서 한 남자는 《라드하비노드 팔의 재판》이라는 책을 큰 소리로 읽으려 한다. 그러나 남자의 어깨 너머 어둠 속에서 자꾸만 여러 손들이 나와 그를 방해한다. 어둠 속 손들은 그의 뺨을 때리고, 입에 공을 물리는가 하면, 책을 뺏고 찢으면서 책 읽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동아시아 전범을 재판하기 위해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1946-1948)’에서 비롯한다. 재판에서 라드하비노드 팔 판사는 아시아 판사 중 유일하게 모든 일본 전쟁전범을 무죄라고 판결했다. 또 일본의 군국주의와 전쟁을 찬양했던 문학가 오카와 슈메이는 재판 첫날 “이것이 희극이다”라고 외쳤는데, 결국 그는 정신이상 진단을 받고 사형을 면했다. 작가는 마치 희극 같은 역사적 사건을 행위예술로 소환해 라드하비노드 팔로 상징되는 제도 권력을 고발한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진실’을 읽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손들은 역사의 과오를 은폐하고 왜곡하려 했던 ‘보이지 않는’ 제도 권력을 의미하는 듯하다.

  1부가 몸이 기억한 역사를 전시했다면, 2부에서는 몸이 말하는 사회가 펼쳐진다. 2부 ‘일상의 몸짓, 사회적 안무’는 지금의 사회를 말하는 일상적 몸짓들이 소개돼있다. 프란시스 알리스의 ‘행상(1992-2006)’이 집중한 일상적 행위는 ‘걷기’다. 작품은 멕시코시티 거리를 걷는 노동자들의 사진 80점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사진 속 노동자들은 자전거, 수레 등에 솜이불, 폐지, 직물, 선인장, 아이스크림 박스와 같이 다양한 물품을 싣고 그저 걷는다. 때론 자신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짐을 등에 인 채 걷고, 때론 거대한 헬륨풍선 묶음을 들고 있어 마치 풍선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에게 걷는 행위는 일상적이기도 하고, 정치적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도시에서 걷기란 누군가에게는 산책과 같이 노동과 단절된 여가 행위며, 누군가에게는 목적지를 잃은 ‘유목 상태’다. 또 소외된 계층에게는 유일한 이동수단일 수 있으며, 이때 걷기란 적극적인 노동이자 생존을 위한 행위다. 작가는 걷기의 다층적 의미를 조명하며 일상적 몸짓을 사회적 의제로 소환한다.


2.jpg

▲ 프란시스 알리스의 '행상'에서 노동자들은 그저 걷는다. ⓒ국립현대미술관


  3부 ‘공동체를 퍼포밍하다’는 몸과 몸의 친밀한 만남을 통한 ‘우리’, 즉 공동체의 회복을 말한다. 전시는 공동체의 형성이 “내 주변의 타자가 나를 위협하는 대신, 나의 몸을, 나의 생명을 돌보아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며, 몸의 만남에 관한 작품을 소개한다. 타나카 코키의 ‘5명의 피아니스트들에 의해 동시에 연주되는 피아노(첫 번째 시도)(2012)’는 너와 나의 몸이 만나 ‘우리’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작곡, 클래식 음악, 재즈 등 서로 다른 음악 장르를 전공하는 5명의 피아노 연주자들은 한 대의 피아노를 동시에 연주해야 한다. 과제를 받은 연주자들은 당황하지만 일단 합주를 시도하고, 누군가 박자를 놓쳐 음악이 끊기자 논의를 시작한다. 그들의 논의는 베이스 라인과 멜로디 라인과 같이 음악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공동체에 대한 고민과 닮아있다. 낱낱의 음계와 전체적인 조화 중 어느 것에 집중할지 고민하는 연주자에게 다른 연주자가 답한다. “그건 우리가 어떤 음악을 하느냐에 달렸어.” 연주자들은 양손을 써보기도 하고, 한 사람씩 순차적으로 연주에 참여하기도 하며 어떤 색의 ‘우리’가 될지, 어떤 형태로 그 ‘우리’를 실현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문제점을 찾고, 그 결과 언어로 된 규칙을 만들어낸다. 규칙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먼저 몸과 몸의 만남이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5명의 피아니스트들이 좁은 피아노 의자에 부대껴앉아 몸으로 대화를 나누며 ‘우리’를 만들었고, 그 ‘우리’의 가능성을 언어로 깨달은 것이다. 몸과 몸의 만남을 통해 마침내 그들은 하나의 멋들어진 연주를 완성해낸다.   


3.png

▲ 타나카 코키의 '5명의 피아니스트들에 의해 동시에 연주되는 피아노' ⓒ국립현대미술관


  해당 작품으로 마무리되는 전시는 관객에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우리의 몸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고,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고. 우리의 몸이 누구와 맞닿아 있고, 그 맞닿음이 ‘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