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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어
등록일 2018.03.07 22:03l최종 업데이트 2018.03.07 22:04l 허주현 기자(aattgx@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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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은 행위에 동한다. 낯익던 사건은 일상 속에 분해된 채 흐려졌다가도, 낯선 몸짓 속에 가끔 찾아와 나를 타격한다. 행위는 기억에 동한다. 기억이 불러낸 느낌대로 움직이고 말하고 기록한다. 글과 사진으로 저축한 감정의 보따리는 점점 묵직해졌다. 난 이 주머니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 불안했다. 가장 벅찬 순간에는 이 행복이 곧 사라질까 두려웠고, 가장 슬픈 순간에는 내 마음을 알아줄 타인이 필요해 외로웠다. 기쁨과 슬픔, 그 어떤 감정이라도 그것은 현재의 것도, 온전한 나의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행복은 미래의 좌절에, 현재의 우울은 타인의 위로에 빚지고 있었다.

  시간과 공동체에 빚진 감정을 기억하고 싶어 커버스토리 ‘우울해도 괜찮아’를 기획했다. 커버스토리는 우울을 경험한 이들, 우울을 연구하는 자, 우울을 바라보는 사람의 목소리를 담았다. ‘그들’의 목소리이기보다 ‘나’와 ‘너’, ‘우리’의 목소리이길 바랐다. 우울은 우리 모두의 이름을 빌린다. 우울과 우울증은 다르다지만, 어떤 형태의 우울이든 그 무력감에 능숙하게 대처할 자 있을까.

  감정은 언제나 낯설고, 낯섦에 대처하는 우리는 언제나 미숙하다. 나는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감정 앞에 무력한 어눌함을 감췄다. 반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찾아가 봉사하던 병원에서 활동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이대로만 매일매일이 흘러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몸과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은 이들은 지금처럼만 힘을 내주길, 잠시 들렀다 가는 내 발길은 욕심 없이 작은 숨결로만 남길 바랐다. 그러나 고요함으로 둔갑한들, 아픔은 아픔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하면 좋겠다는 건 거짓 바람이다. 아픈 사람, 슬픈 사람, 고달픈 사람 없는 세상을 바라는 건 헛된 희망이다. 이 세상 누군가는 플라스틱 관에 의지해 생명을 부지하고, 다른 누군가는 동반자의 상실에 눈물 흘리고, 많은 이는 그저 하루를 버티려 땀 흘린다. 사회와 불화하는 우울한 이들에게 범사에 만족하고, 태어난 일에 감사하라는 조언은 무책임하다. 우울한 이는 우울 앞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유 있는 우울함은 불가항력적이라 잔인하고, 이유 없는 우울함은 캐물을 곳 없어 답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겁더라도 슬픈 하루를 시작할 수 있고, 고달픈 하루 끝에 지쳐서나마 잠들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할 수 있는 일이 무기력한 하루를 열고 닫는 일뿐일지라도 ‘우리’와 ‘내일’이 있어 다행인 삶이었으면 한다. 우울 앞에 언제나 미숙할지라도, 우울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고 수긍하는 능숙함이 있노라고, 버겁다고 우짖던 내게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준 시간과 사람을 기억하려 전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