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호 > 사회
"우리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다" 미군 '위안부', '도구화'의 역사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
등록일 2018.04.12 00:47l최종 업데이트 2018.04.12 00:50l 박수현 기자(oksh497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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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지촌 미군 ‘위안부’(위안부)는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주한미군 주둔지 주변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한 여성들이다. 당시에도 성매매는 명백한 불법이었지만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 유지와 외화 벌이를 위해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는 오히려 그들의 성을 도구화했고, 그들이 겪었던 폭력과 인권침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피고 대한민국은 성병 치료 등 공익을 위해 기지촌 성매매를 관리했을 뿐이라 주장하고 있다. 오랫동안 낙인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던 미군 위안부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돼온 국가 폭력을 말하는 또 하나의 증인이다.


법을 어기며 동맹 유지와 외화 획득을 좇은 정부

  미군 위안부의 시초는 연합군 위안부다. 이는 1948년 공창제(일제강점기 도입된 국가규제 성매매 제도)가 폐지됐음에도 한국전쟁 발발 후 정부에 의해 공창과 다름없이 운영됐다. 미군 부대는 전후부터 경기도 동두천, 의정부, 평택, 전북 군산 등 전국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연합군 위안소는 기지촌 내 미군 전용 클럽의 형태로 계승됐다. 전쟁은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고 생계 수단을 찾아 나선 많은 여성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성(性)산업으로 유입됐다. 〈한국일보〉는 1955년 당시 기지촌에서 외국인을 상대하는 여성이 약 6만 명이라 보도했다. 이들은 법령에서 위안부로 명명됐는데, 보건부 1951년 예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지시에 관한 건」은 위안부를 “위안소에서 외군을 상대로 위안접객(慰安接客)을 업으로 하는 부녀자”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1957년 시행된 「전염병예방법시행령」에서도 발견된다. 시행령은 “위안부 또는 매음행위를 하는 자”의 경우 1주에 2회 의무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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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아메리카타운에 있는 과거 위안시설로 사용된 건물 ⓒ새움터



  박정희 정권 하에서 미군 위안부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더욱 강화됐다. 기지촌 탈성매매 여성을 지원하는 단체 ‘새움터’의 신영숙 대표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정당성 확보를 위해 미군을 계속해서 주둔시키고 외화를 벌어들이고자 했다”며 “그것이 병사의 성병을 관리하고자 했던 미군의 이해와 맞아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국가의 관리가 강화된 배경에는 당시 정권과 미군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성매매를 포괄적으로 금지하면서도 기지촌 성매매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모순된 행태를 보였다. 1961년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 제정·시행돼 성 판매 행위의 금지 및 처벌이 구체적으로 규정됐다. 또 같은 해 정부는 성매매 착취 등을 금지하는 인신매매금지국제협약에 가입했다. 그러나 다음해 내무부, 법무부, 보건사회부의 공통지침으로 성매매 영업이 가능한 104개의 ‘특정지역’이 조성됐으며 그 중 61개소는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62년의 보건사회부 예규 「간이특수음식점 영업위생행정사무취급요령」은 미군을 상대로 하는 업소의 설치 구역, 위생 세부 기준 등을 규정했다. 1962년부터 박정희 정부는 지역재건부녀회에 등록한 미군 위안부를 대상으로 ‘애국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미군 장교와 군수, 경찰서장, 특수관광협회장 등이 참석했는데, 그들은 위안부 여성들을 ‘한국을 돕기 위해 주둔한 미군을 위안하고 국가 경제를 부강하게 하는 애국자’로 칭송하며 성매매를 조장했다.

  국가의 성병관리는 강화됐으며 그 과정에서 수단화된 위안부 여성들은 기본권을 침해당했다. 1962년 시행된 「식품위생법」과 동 시행규칙은 ‘유흥접객부’가 지방정부에 등록하는 절차를 규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성병 검진 결과가 적힌 보건증을 항상 휴대하도록 했다. 「전염병예방법」에 의거해 성병 검진이 지속됐으며, 나아가 정부는 성병관리소(낙검자수용소)를 설립해 1965년부터 성병 치료를 강제하기까지 했다.

  성병 검진은 1주에 한두 번이라는 잦은 빈도로 강제됐다. 또 생식기 검진 방식으로 이뤄져 위안부 여성들이 검진을 받는데 치욕스러움을 느꼈다. 많은 여성들이 검진을 피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정부는 미군과 보건소 관계자를 동반한 경찰 단속을 통해 검진을 받지 않았거나 성병에 걸린 여성들을 색출했다. 하지만 검진기피자 처벌과 관련한 법적 근거는 1969년까지 부재했다. 만약 검진에서 감염자로 판명되거나, 성병에 걸리지 않았어도 미군에 의해 성병이 있다고 지목당한 경우 위안부 여성들은 수용소에서 강제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평균 4~5일간 감금돼 부작용 위험이 큰 페니실린 주사를 맞았다. (위 설명은 박정미(2015), 〈한국 기지촌 성매매 정책의 역사사회학, 1953-1995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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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소요산 자락에 위치한 성병관리소 외부 ⓒ새움터



미군 위안부에게 남은 상흔

  미군 위안부는 기지촌 성매매를 조성·관리하며 폭력적인 성병 검진까지 방조한 국가로부터 심각한 피해를 겪었다. 그러나 폭력의 주체는 국가뿐만이 아니었다. 포주, 미군 등 민간 영역에서도 폭력은 이어졌다. 여성들은 기지촌에서 성매매강요, 인신매매, 화대착취, 강제낙태, 구타, 마약투여 등을 겪었다고 증언했으며 그에 따른 신체적, 정신적, 사회경제적 피해는 지속되고 있다. 2014년 새움터가 위안부 여성 1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약 88%가 자신의 건강상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신영숙 대표는 많은 위안부 여성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오랜 기간 괴로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위안부 여성들은 미군의 폭력에도 쉽게 노출됐다. 1992년 故윤금이 씨 살인사건 등 기지촌 여성을 상대로 미군의 흉악 범죄가 많이 일어났지만, 정부의 소극적인 대처로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사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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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이상 여성과 미군 위안부 간 본인 인지 유병률 비교 ⓒ새움터



  미군 위안부는 국가적 획책에 따라 삶을 박탈당했음에도 ‘자발적 성매매 여성’으로 오인되기 일쑤다. 신영숙 대표는 “소송 초기 ‘미군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산업에 종사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많았다”며 피해자를 향한 사회의 왜곡된 시선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피해자는 인신매매로 기지촌에 가게 됐고 이들 중 상당수는 직업소개소에서 사기를 당했다. 증언록을 남긴 미군 위안부 당사자 김정자 씨는 고향 친구의 알선으로 기지촌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 채 파주 용주골로 가게 됐다. 나아가 그곳에서 일하던 친구의 빚까지 떠안게 됐다. 신 대표는 “기지촌에 대해 알고 간 여성들도 일부 있었지만 포주가 빚을 씌우고 성매매를 강요하며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착취 구조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미군 위안부들은 “기지촌의 실태를 알았다면 그 어떤 여성도 기지촌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피고 대한민국 역시 배상 책임을 부인하기 위해 피해자의 성매매는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변호를 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하주희 미군문제연구위원장은 “만약 완전히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산업에 들어갔다면 기지촌에서의 생활이나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도 자유로워야 한다”며 무책임한 국가의 태도를 지적했다. 미군 위안부는 성매매를 강요받고 강제 성병 검진과 치료를 받으며 생활상의 자유를 침해당했다. 감시를 피해 기지촌을 도망치더라도 잡혀와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국가가 기지촌 성매매를 방조하는 동안 사회는 미군 위안부를 ‘양공주’ 등으로 멸칭하며 낙인찍었다. 낙인에 대한 두려움은 현재까지도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신영숙 대표는 “피해사실 공개에 따를 낙인을 염려해 소송 동참을 포기했던 여성들도 있다”고 전했다. 미군 위안부의 대다수가 성매매를 더 이상 하지 않더라도 기지촌에 남아있는 것 또한 새로운 지역사회에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다. 신 대표는 “미군 위안부들은 노인복지시설에 들어가기도 어렵다”며 가족과 직업 등에 대한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는 그들의 입장을 설명했다.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경제적으로도 악조건에 처해있다. 오랜 기간 기지촌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6-70대의 고령이 된 대다수의 미군 위안부들은 비교적 월세가 낮은 기지촌 주변 미개발 지역에 혼자 거주하고 있다. 새움터의 설문조사(2014)에 따르면 이들의 월평균 소득은 49.6만원에 그쳤고, 국민기초생활급여가 소득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마저도 약 36%를 월세로 지불하면 생활을 이어나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상대적 저연령층의 경우에도 사회적 낙인, 경력 단절 등으로 구직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럼에도 연대하고 주체가 되기까지

  위안부 여성들은 고통을 감내하기만 하는 소극적인 피해자가 아니었다. 중앙대 이나영 교수(사회학)의 〈기지촌의 공고화 과정에 관한 연구〉는 “1967년 11월 동두천에서 동거하던 미군에게 임신 4개월의 위안부가 살해당하자 200여명의 동료들이 그녀의 상여를 메고 미7사단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으며, 사단장을 대신해 미헌병사령관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 밖에도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함께 조직적인 시위를 벌이곤 했다.

  1990년대 들어 피해자가 학생 및 활동가와 연대하며, 미군 기지촌 내 정부의 노골적 개입도 수그러들었다. 미군 위안부가 사회 구성원과 연대할 수 있던 것은 민주화 이후 여성운동을 비롯해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던 당대 정치사회적 분위기와 관련된다. 90년대 대학생들은 기지촌을 방문해 위안부 여성들과 교류하고 그들에게 지지를 보내는 ‘기활’을 갔다. 신 대표는 “고립된 삶을 살아온 기지촌 여성들이 학생들과의 ‘기활’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미군 위안부에 대한 구조적 문제의식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위안부 여성들이 학생들과의 활동을 자주 언급하며 그리워한다고 전했다.

  미군 위안부 피해자 122명은 2014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성매매 산업에서 벗어난 이후 활동가들과 함께 정부 문서를 발굴하고 토론하며 기지촌에서의 삶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개입한 구조적 문제였음을 깨달은 결과였다. 2012년 몇 명의 위안부 여성들이 새움터를 찾아와 “생이 마감되기 전에 국가로부터 받은 피해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리고 싶다”며 소송 의지를 밝혔다. 신 대표는 이들을 돕고자 당사자들과 함께 온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함께 발굴했고 민변이 이들을 도운 것이 소송의 시작이었다. 피해자와 활동가, 시민의 연대가 소송을 가능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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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서울 서초구 법원 앞 삼거리에서 열린 항소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 ⓒ한국일보



  그 결과 지난 2월 8일 서울고등법원 민사22부는 기지촌 미군 위안부 117명에 대한 국가의 성매매 조장 및 방조 행위를 인정해 정부가 원고 모두에게 배상하라는 2심 판결을 내렸다. 하주희 변호사는 “국가의 책임이 전면적으로 인정된 매우 의미있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앞선 1심 판결에서는 배상책임 대상이 1977년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이 만들어지기 전 성병관리소에 강제 수용된 위안부들에 한정됐다. 국가가 성매매를 정당화한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성병관리소의 수용대상을 명시하기 이전에 이뤄진 강제 수용이 위법했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2심 판결까지의 과정은 국가의 책임이 재판부에 의해 인정됐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지만 피해자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명백히 국가폭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규정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의미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미군 위안부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아니다. 신영숙 대표는 2심 판결에서 일부 패소한 부분이 있었고, 이에 대해 당사자들이 문제의식을 느껴 2월 22일에 상고를 했다고 전했다. 또 하주희 변호사는 미군에 대한 책임 규명 문제를 언급하며 재판이 끝나고도 제일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음을 분명히 했다.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군사주의와 여성혐오에 있다. 신영숙 대표는 “폭력이 정당화되고 힘이 지배하는 군사주의 문화에 가부장제가 합쳐져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으로 반복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나영 교수는 현재까지도 나아지지 않은 잘못된 성인식이 위안부를 만들어내고, 위안부 여성들을 낙인찍으며 그것에 대한 공론화를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군 위안부와 비교해 미군 위안부 문제는 상대적으로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데, 이 교수는 이에 대해 “여전히 우리나라가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걸 방증”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목소리는 점점 크기를 키워오고 있으며, 불평등했던 기억은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