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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봄, 또 다시 함께하겠다고 적는다
등록일 2018.04.13 00:11l최종 업데이트 2018.04.13 00:13l 이지윤 (정치외교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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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의 시간이 흘렀다. 광화문 광장에 노란빛 천막이 세워지고 그날의 참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하나둘 모여 매일같이 그곳을 지켜온 지도 천몇백여 일이 훌쩍 넘었다. 어수룩한 14학번 새내기였던 나도 어느새 졸업을 코앞에 둔 학년이 됐다. 관악에서의 지난 몇 년을 되돌아보면 난 그다지 용기 있는 학생이 아니었다. 선두에 서서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자라지 못한 어린 생각을 들키기 싫어 뒤로 숨었고, 내 안에서만 작은 목소리로 메아리치면서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매번 이겨내고자 했던 이런 내 부끄러운 모습은 지금도 크게 달라진 바 없다. 그럼에도 잊지 않겠다고, 기억하겠다고 노래했던 지난날 광장에서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세월호와 함께 한 나의 대학, 그곳에 담긴 숱한 기억들에 대해서.

  하나, 1주기 무렵의 일이다. 계속되는 농성과 단식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유가족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이들이 광화문 일대에 모였다. 이들은 특조위의 진상규명 활동을 무력화시키려는 정부의 시행령에 반대하면서 행렬을 지켰고, 곧 경찰이 뿌려대는 물대포와 최루액을 맞닥뜨렸다. 그리고 그날 밤 광장에서의 치열했던 대치는 우리들의 일상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언론은 일부 집회 참가자의 폭력 행위와 위법성에 대해 떠들면서도 선제적인 차벽 설치의 위헌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대학은 민감한 사안으로 규정돼버린 세월호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나눌 공간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내려간 고향집에서 엄마는 내 가방에 달려 있던 노란 리본을 조용히 떼버렸다. 그날 침몰하는 세월호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마음들이 반으로 갈라진 현실이 슬펐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자보를 썼다. 유가족을 ‘정치적’이라고 공격하던 그 누구보다 정치적이었던 이들을 향해 내 몸보다도 큰 종이를 학교 곳곳에 붙였다. 종이는 닳아 떨어진 지 오래지만 함께하겠다고 적었던 마지막 문장만큼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둘, 안국역의 어느 인권 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시작했다. 그 단체는 당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부유하던 막대한 양의 기록을 분석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유가족의 절실한 요구였던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은 계속해서 이뤄지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특조위조차 정권의 조직적인 방해를 받으면서 간신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시민들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판결문을 정리하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사소한 역할을 담당하며 일을 도왔다. 없느니만 못했던 나와 달리 매일같이 자리를 지키셨던 분들은 그날의 기록이 담긴 자료를 들춰 진실의 조각을 맞추고, 가끔은 눈물로 긴 긴 밤을 지새워가면서, 단어 하나하나를 한 권의 책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결국 2주기를 조금 앞둔 봄날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라는 책이 출판됐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고달픈 투쟁의 현장에 평생 몸담을 각오를 다지기 두려워 도망치려고만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전혀 다른 꿈을 가진 이들이 한 데 모여 세월호의 진실을 수면 밖으로 인양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자신만의 색깔로 함께할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모두를 버릴 만큼의 큰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하는 길에는 각자의 다양한 여정이 존재한다고 비로소 스스로에게 확신할 수 있었다.

  셋, 촛불을 들었다. 앉을 자리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빼곡했던 광장에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까지 어둠과 싸우며 빛을 밝혔다. 나는 차가운 도로에 앉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치를 떨었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해 이야기했고, 정권 하에서 갈가리 찢기고 바래진 세월호를 떠올렸다. 참사 당일부터 유가족은 언론의 보도와는 전혀 다른 팽목항의 현실을 직접 목격해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은 식구가 눈에 밟혀 그들은 세월호의 선장이 그랬던 것처럼 혼자서만 도망칠 수 없었다. 온갖 욕과 비아냥을 감수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650만 여명의 서명을 받았고 간신히 특별법을 통과시켰지만,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특조위조차 종합 보고서 하나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정부에 의해 강제로 활동을 종료 당해야만 했다. 3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세월호는 여전히 바다에 잠겨있었고 진상규명은 아득해보였다. 참사의 과정에서 드러난 정권의 무능과 그보다 더했던 끈질긴 방해는 내가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게 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해 봄 우리는 결국 탄핵을 이뤘고, 헌법재판소의 법리적인 결정에 따라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소추사유는 대통령의 파면요건으로 결정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수십 번이 넘게 광장에 나가 노란빛 천막 옆에서 촛불을 들었던 그 밤들은 계속해서 기억에 남아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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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0일 열린 세월호 참사, '죄를 묻다' 시민문화제의 모습 Ⓒ이가온 기자 



  네 번째 봄이 온다. 첫 번째 봄에는 덜컥 함께하겠다고 적었고, 두 번째 봄에는 함께하는 그 길에 여러 여정이 있음을 깨달아 더 이상 망설이거나 좌절하지 않았고, 세 번째 봄에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모두가 함께하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냈다. 코앞으로 다가온 네 번째 봄에 나는 또 다시 함께하겠다고 적는다. 왜 아직도 세월호냐고 묻는 이들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냐고 되물어본다. 사회적 참사 특별법에 따라 구성될 2기 특조위는 시작부터 자유한국당의 강한 견제를 받고 있고, 검찰 조사 결과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증언이 거짓말로 얼룩졌음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으며, 국가 차원의 철저한 진상규명으로 안전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그 오래된 약속은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함께해야 한다. 도로 한복판 어색하기만 했던 노란빛 천막이 이제는 눈에 익은 풍경이더라도 더 이상 봄의 광화문을 적막하게 내버려두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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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윤(정치외교 14)
대학신문 전 사회부장이자 어쩌다보니 저널에 글까지 쓰게 된 이지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