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호 > 사회 >우리가 만난 사람
남한사람도 북한사람도 아닌, 우리는 재일조선인 재일조선인 3세 성공회대 조경희 교수를 만나다
등록일 2018.06.05 09:20l최종 업데이트 2018.08.11 14:41l 유서희 기자(cow1103582@snu.ac.kr)

조회 수:2845

1.jpg

▲재일조선인 3세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조경희 HK교수 ⓒ김연신 기자



  재일조선인은 우리에게 낯선 존재다. 그 이름이 낯설게 다가오는 만큼 재일조선인은 역사적인 설명보다 추성훈, 정대세, 사오리 등 유명인을 통해 설명되곤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 뒤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재일조선인 정체성이 존재한다. 성공회대 열림교양대 조경희 조교수를 통해 재일조선인의 과거와 현재를 들을 수 있었다.


국적 없는 ‘무국적 동포’, 조선적(朝鮮籍) 재일조선인

  

  조경희 교수는 학생들로부터 ‘수업에서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항의를 종종 받는다. 그러나 조 교수는 이러한 ‘불편함’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불편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재일조선인 문제해결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분단체제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재일조선인을 조선족 혹은 친북적인 사람으로 오해하는 일이 흔하다. 재일조선인을 지칭하는 다양한 용어들은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므로 사용에 유의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재일교포’라는 용어가 흔히 쓰인다. 재일교포는 박정희 정권 시기에 빈번히 사용됐는데, 교포(僑胞)는 ‘정착하지 못하고 잠시 머무르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조된 용어다. 이후 민족주의적 관념이 담긴 ‘재일동포’가 등장했다. 일본에서 자·타칭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돼온 것을 반영하여 재일조선인을 주된 학술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조선적자뿐 아니라 귀화한 한국적, 북한적, 일본적, 조선적자를 모두 포함한다.
  

  식민지 시기에는 재일조선인 모두가 일본 국적자였으므로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일본에 둥지를 튼 뒤로 해방 후에도 한반도로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을 ‘잔류조선인’으로 칭하다 일본 사회에서 ‘자이니치’, ‘자이니치 조센징’으로 불리던 것을 따라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로 정착된 것이다. 이들은 일본 정부의 행정상 편의를 위해 ‘조선적’으로 분류됐다.

  

  1965년 한일협정을 맺으며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을 ‘한국적’으로 정식 인정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상당수 재일조선인은 조선적을 유지했다. 조경희 교수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우선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의 최하층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국적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재일조선인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보호해줄 사회적 장치도 전무했기 때문이다. 또 재일조선인 중 상당수가 북한을 가깝게 느낀 점도 이들이 조선적을 유지한 이유다. 분단 이후 재일조선인 사회는 남한보다 북한 정부의 관심을 더 많이 받았고 북쪽에 가족을 둔 재일조선인도 많았다. 1959년부터 83년까지 북한이 추진한 북송사업으로 9만 명이 넘는 재일조선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조경희 교수는 “북쪽에 가족을 두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여전히 3만 명 정도의 재일조선인이 현재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학교, 재일조선인 정체성 유지의 원동력



  조선적 재일조선인이던 조경희 교수는 일본유치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자신이 일본인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동급생인 일본 친구들과 이름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언니, 오빠를 따라 조선학교에 진학했지만, 재일조선인의 조선학교 진학률은 높지않았다. 1970년대 초반 기준 조선학교 학생 수는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공식적인 학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지원금에서 차별을 두는 등의 탄압을 가한 탓이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남한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조선학교는 북한 정부의 관심과 간섭을 받아왔다. 교실에 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려있었고, 교육과정에 사상교육이 포함됐다. 그러나 북한과 조선학교의 관계를 북한의 일방적인 지원으로 보기는 어렵다.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 재일조선인은 주로 파친코(일본 대중오락 게임장), 야끼니꾸(소고기구이) 등의 상공업을 통해 생계를 꾸려왔다. 북한 정부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상공업으로 성공한 재일조선인이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에 전달한 기부금을 북한으로 전달했고, 총련에서 운영하는 조선학교에 북한이 지원금을 주는 식으로 자금은 돌고 돌았다.

  

  조선학교는 일본 사회의 탄압과 남북한 사회로부터의 소외 속에서도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조선학교에 대한 한국인의 시선이 달갑지만은 않다. 조선학교 생활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조선학교〉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재일조선인에 무심한 한국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조 교수는 “영화 〈조선학교〉에 대한 상당수 한국 사람들의 반응은 순수하고 착한 학생들이 북한교육을 받아서 안타깝다는 식”이라며 “오히려 오랫동안 재일조선인들을 방치해온 남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무지도 조 교수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일본을 삶의 터전으로 삼으며 일본의 문화적 감각에 익숙했던 조 교수와 달리 일본인에게 조 교수는 이방인이었다. 일본 대학에서 ‘조경희’라는 이름을 소개하면 모두가 그를 재일조선인이 아닌 유학생으로 생각했다. 일본인들이 재일조선인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일본 사회에 대한 실망으로 조 교수는 ‘순응’의 길을 택했다.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설명하기보다 일본의 감각에 맞춰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귀찮을뿐더러 무엇보다 정체성에 따른 오랜 상처와 일본 사회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thumb_IMG_4427_1024.jpg

▲1992년 일본 치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통일팀을 응원하는 조선학교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조경희 교수(한반도기 오른쪽)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재일조선인을 향한 혐한 물결

  

  오늘날 일본 사회는 조 교수의 대학 시절보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거부감이 더욱 커져 이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분위기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부정적 정서가 동북아 정세와 결합하면서 혐한 정서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대학 재학시절을 “탈냉전 이후 개방적 분위기에서 다문화주의가 거론되기 시작하고 국적의 억압에서 자유로운 재일조선인 3세가 등장한, 그나마 좋았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재일조선인을 향한 혐오 정서는 90년대 후반 일본의 우경화, 2000년대 중반 혐한류에서 이어져 오늘날 ‘헤이트스피치’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헤이트스피치라는 용어가 2013년 일본에서 유행어 대상을 받을 정도로 혐오 정서가 심각한 상황이다.

  

  혐한 정서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에서 출발했다. 과거부터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만연했지만, 극단적 차별과 혐오가 끓어오른 건 2002년 북한 정부가 1970년대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면서부터다. 또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문제와 한일전으로 민족 정서가 고조되고, 2005년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재일조선인과 남북한에 대한 폄하 공세는 거세졌다.
  

  그러나 조 교수는 오늘날 헤이트스피치로 표출되는 혐한 정서가 과거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탄압과는 구분된다고 지적했다. 과거의 차별적 발언은 “김치 냄새, 마늘 냄새가 난다”, “일본을 떠나라” 등의 발언에 머물렀다면, 오늘날에는 중학생이 거리에서 확성기를 들고 “한국인 여성 강간하자”라고 외치는 정도다. 조 교수는 “공개적인 혐오표현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기존 민족차별의 수준을 넘어선 훨씬 심각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표현을 규제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졌다. 2014년 일본최고재판소가 극우·혐한 단체인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않는 시민의 모임)’의 헤이트스피치를 민족차별로 인정해 손해배상을 명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4월에는 모욕죄보다 강력한 명예훼손 혐의로 혐오표현이 기소됐다. 2016년에는 ‘헤이트스피치 방지법’이 제정되고, 헤이트스피치를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의 집회가 열리는 등 혐오표현을 규제하고 자정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으나 여전히 헤이트스피치는 재일조선인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에 첫발을 딛기부터 한국적을 취득하기까지


  조경희 교수는 20대 시절이던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에는 한류도 없었고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의 한국 방문이 시작된 것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 사이의 화해기류가 이어지면서부터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의 한국 방문이 어느 정도 허용됐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재일조선인 지인들로부터 “한국 방문이 너무 감동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조 교수가 한국행을 결심한 계기였다.

  

  그는 처음에는 여행으로, 두 번째는 서울대 학생교류 사업으로 한국을 방문한 후 한국 유학길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서울대 교류 시절, 한국인 친구 하나 없었지만 2002년 뜨거웠던 월드컵 열기 속에서 하나가 됐던 경험으로 한국에 매료됐다. 유학을 위한 세 번째 방문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지구촌동포연대’라는 NGO 활동을 하면서 재외 동포 친구들을 사귀고 지금의 남편도 만났다. 유학을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도쿄 영사에서는 한국을 방문하려는 재일조선인에게 장기여행 비자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보통 1개월짜리 여행증명서를 발급했고, 길어도 3개월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조 교수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 이례적으로 8개월짜리 여행증명서를 받아낸 덕분에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고, 이때의 경험으로 한국에 정착하겠다는 마음을 키워갔다.

  

  2003년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조 교수는 다시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세 번 이상 한국방문을 허용해주지 않는 영사관 관습 때문에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한국 사람과 결혼해 한국적을 취득한 후에야 한국을 삶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었다.



사상검증식 입국절차, 한국에 대한 거부감만 키워


   2018년에 들어 한국 사회는 재일조선인에 너그러워진 듯 보였다. 총련계 재일조선인 응원단이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에 원활히 입국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계속된 탄압적 분위기가 누그러진 덕분이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의 입국이 허용된다고 해서 이들에 대한 폭력적 잔재가 일소되는 것은 아니다. 조 교수는 “한국 사회에 여전히 전향정책(기존의 사상이나 이념을 그와 배치되는 사상이나 이념으로 돌리는 정책)이 남아있고 국가보안법이 적용된다”며 남한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사상검증식 정책에 대한 거부감을 밝혔다.
  

  한국과 북한의 국적법은 재일조선인을 포함한 모든 재외동포를 국민으로 인정하지만, 이들의 운용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북한 정부는 재일조선인이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이상 그들을 ‘해외공민’으로 간주한다. 반면 한국정부는 여권발급을 통해 강력한 사상검증절차를 거친다. 일본의 외국인등록증의 표식을 조선이 아닌 한국으로 변경해야만 여권을 발급해준다는 조건이 그 예다. 조선적으로 남는 사람에게는 여권 대신 여행증명서를 발급한다. 보수 정권에서는 재일조선인을 한국적으로 전향시키기위해 암묵적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재일조선인은 한국적 취득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다. 조 교수는 “자신의 삶과 역사를 부정하고 모욕하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 조선적을 지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한국인보다 재일조선인이 한반도 평화에 대한 열망이 크다”고 강조했다. 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인 디아스포라가 민족적 열망이 강할 뿐 아니라, 재일조선인은 분단의 비극을 경험한 탓에 통일 국가를 절대선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반도 평화 기류에 재일조선인이 환호하는 이유다. 재일조선인들은 도쿄 신주쿠, 오사카 등 일본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정상회담 생중계를 함께 시청하기도 했다. 조 교수는 평창올림픽 이후 남북 화해 움직임에 대해 “한국 사회가 통일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며 웃어 보였다. 그간 통일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 적었고 ‘빨갱이’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것과 대비되는 평화 기류에 재일조선인 사회는 희망으로 차올랐다.



“과거에 대한 진상규명이 재일조선인 문제해결의 출발점”


  재일조선인은 한국 사회에서 오래도록 역사적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재일조선인을 반공주의와 독재정권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80년대까지 공론화는 불가능했다. 이들은 간첩 혹은 상공인으로 성공해 한국인보다 잘 사는 이기적인 자들로 오해받기도 했다. 다른 한편 민족교육의 기회가 부족했던 재일조선인 2세들은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해 이른바 ‘쪽발이’로 불리기도 했다. 재일조선인이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국제 사회에 탈냉전이 전개되고, 한국이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90년대부터다.
  

  조경희 교수는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든 재외동포의 문제든 “과거에 대한 진상규명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며 “재외동포의 시각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한국의 교과서는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가 한국사라고 생각하는 역사는 시대를 경험한 모든 이들의 관점을 담아내지 못한다. 왜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는지를 고민하고 과거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재일조선인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조 교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