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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교수 운동',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등록일 2018.06.07 22:16l최종 업데이트 2018.06.20 13:51l 김일환 (사회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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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무리의 사회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라는 이름으로 모인 것이 2016년 11월의 일이다. 이제는 ‘H교수’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 당시 사회학과 학과장의 각종 인권침해와 성희롱에 대한 공론화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로부터 1년 반이란 시간이 지났고, 지난 5월 24일 나를 포함한 ‘대책위’ 10명 전원은 사회학과 과사무실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야 지난 시간들을 다시 천천히 되짚어보게 된다.


대책위원회의 사건조사와 ‘조용한’ 공론

  사실 ‘대책위’가 만들어지게 된 어떤 결정적인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히 몇 명의 대학원생들이 새롭게 듣게 된 ‘H교수’의 문제적 언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거 너무 심각하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공유하게 된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알지 못했고, 해결 가능성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막연히 “뭔가 해보자”라는 의견이 모였다. 10여 명으로 이루어진 ‘대책위’는 약 3달 동안 ‘H교수’와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인터뷰하고, 녹취록을 만들고, 피해사례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여러 사실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니 ‘H교수’의 각종 인권침해 행위가 얼마나 지속적이었는지, 피해자들을 얼마나 철저히 고립시키고 사안을 은폐하려고 했는지가 비로소 우리 모두에게 분명해졌다.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입장도 자연스럽게 분명해졌다. “우리는 성희롱을 자행하는 교수에게, 자택의 곰팡이 제거와 양복 수선을 지시하는 교수에게, 학생의 인건비를 갈취하는 교수에게, 그리고 이에 대해 반성조차 하지 않는 교수에게 수업과 지도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 따라서 ‘H교수’에게 ‘해임’ 이상의 중징계가 내려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었지만, 나 스스로도 그러한 확신을 가지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많은 자기반성이 필요했다.

  ‘대책위’가 자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문제의 공론화를 시작한 것은 2017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 우리가 선택한 공론화 방식은 학과 내부 공론화 및 인권센터 신고라는, 대단히 ‘조용하고 얌전한’ 형식이었다. ‘H교수’ 사건의 내용 역시 한동안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인권센터 및 교원징계위원회의 제도적 합리성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제도적으로 규정된 절차를 충실히 따라가기만 하더라도, 학생들의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에 부합하는 결론을 얻어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당시에는 믿었다.


‘정직 3개월’과 ‘해임’ 사이, 학생들의 요구와 징계위원회 사이

  2017년 6월 15일, 지난했던 약 3개월의 조사과정 끝에 인권센터는 피해당사자들과 ‘대책위’가 주장했던 모든 ‘H교수’의 인권침해, 성희롱 및 연구비 횡령 사실에 대해서 “사실관계가 인정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H교수’의 비위사실이 하나하나 빼곡히 담긴 A4 22장에 달하는 결정문의 결론은 다음의 문장이었다. “따라서 서울대학교 총장에게 피신고인에 대한 중징계(정직 3월)을 요청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사실관계가 인정되었기에, 우리의 ‘해임’ 요구와 ‘정직 3개월’ 권고 사이의 까마득한 벽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인권센터의 결정 발표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H교수 운동’은 이 벽을 기어코 넘어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특히 초기 공론화 과정에 나섰던 대학원생들에 뒤이어 학부생들이 ‘H교수 운동’의 새로운 장면들을 만들어갔다. 우리 ‘대책위’ 구성원 모두에게 이러한 ‘H교수 운동’은 놀라움과 경이 그 자체였다. 각 단위에서 작성한 수많은 자보들, 수백 명 수천 명이 연서명한 성명서, 십여 차례에 달하는 기자회견, 각종 사회단체와 교육부에서 주최한 간담회 참석, 하루 6시간씩 진행한 피켓시위, 입학식에서의 플랑시위, 6백여 명이 참여한 본부 앞 촛불집회, 2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천막농성, 사회과학대학 전체의 동맹휴업, 그리고 14일간 이어진 총학생회장의 단식과 70여 명의 동조단식……. 학생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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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집회에서 발언하는 김일환 씨 ⓒ이누리 기자


‘H교수 운동’이 이미 만들어낸 연대와 상호교육의 관계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정직 3개월’이라는 요지부동의 징계위원회 결정이다. 지난주 우리는 이것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자퇴서를 제출했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동안 대학원에서 공부해온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자퇴서 제출은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자퇴서를 제출하고 ‘학위’를 이 싸움의 판돈으로 걸고 나서야, 자신의 ‘건강’을 걸고 14일 동안 단식을 했던 운동선수 출신 총학생회장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 덜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지금 그다지 두렵지는 않다. 공론화를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이것이 우리만의 공허한 주장은 아닐까’라는 공포로부터 이미 우리는 자유롭다. 앞으로 진행될 일들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지난 수 개월간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대학 내 위계와 권력구조를 가로지르는 연대와 상호교육의 관계들을 이미 만들어나갔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것은 오히려 암막 뒤에 숨어 있는 징계위원회였다. ‘H교수 운동’은 수많은 토론과 행동을 통하여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학, 평등하고 안전한 대학의 상들을 제시했고, 이것을 하나의 새로운 ‘상식’으로 정립해나갔다. 이미 우리가 함께 확인한 이러한 가능성들이 더욱 확장되고 심화되기를,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대학에 대한 급진적 상상들이 더욱 풍성하게 제기되길 소망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H교수 운동’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김일환 (사회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