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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생존자'들을 응원합니다
등록일 2018.09.07 13:47l최종 업데이트 2018.09.10 22:40l 유서희 기자(cow110358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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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전 채식을 시작했다. 자취를 시작한 뒤로 마크로비오틱(동양의 자연사상과 음양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식생활) 요리에 재미를 붙여 언젠가는 채식인이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오랜 결심을 실천으로 옮긴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채식주의자인 친구와 가볍게 맥주 한 잔 걸치다 덜컥 선언해버린 것이다. 


  식이소수자가 되면서 내가 그간 얼마나 권력 집단에서 안전하고 오만하게 살았는지 실감했다. 섣부른 호의나 배려가 도리어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채식을 시작한 것밖에 달라진 게 없는데, 어느새 나는 채식주의자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설명됐다. 고기를 ‘못’ 먹는 ‘불쌍한’ 사람. 고기를 ‘안’ 먹어서 ‘행복한’ 나의 주체적인 선택이 육식주의자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불과 한 달 전까지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위계와 위치에 따른 감각은 이토록 다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증언자’이자 ‘생존자’이며, 더 나아가 또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치유자’다. 이처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건만, 이들은 동정이나 시혜를 갈구하는 피해자로 규정되고 주체성은 박탈당한다.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한다”라는 익숙한 고정관념은 피해생존자들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다. 피해생존자들에게 “피해자로 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영원히 형제복지원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받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한다는 이들의 사정이 남 일 같지 않았다. 


  내 불편은 가깝고 남의 불행은 멀다. 과거의 나는 ‘형제’, ‘복지’라는 단어가 주는 따스함 앞에, 여느 복지시설에서 사건이 또 발생했구나 하며 무심히 뉴스를 흘려보냈다. 피해생존자들을 일방적으로 ‘부랑자’로 규정해버린 언론의 프레임도 의심 없이 수용했다.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참석한 진실의 힘 인권상 수상식에서 한종선 씨의 수상소감을 듣기 전까지 이야기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작은 힘을 보태려 한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응원할 것이다. “제 발로 서서, 제 목소리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길에 매진하겠다”는 ‘상처 입은 생존자’들을 응원할 것이다. 취재는 끝났지만, 각종 복지시설의 강제수용과 인권유린은 끝나지 않았다. “형제복지원 취재 끝나면 우리 얘기도 좀 들어줘요”라고 말하던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이 눈에 밟힌다. 말뿐인 무책임한 반성으로, 무관심과 침묵으로 도망치지 말아야지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