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호 > 문화
촬영, “일단 자정 전에만 끝내자”는 건데 열악한 현실 속, 스태프 인권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제시한 길
등록일 2018.10.26 17:30l최종 업데이트 2018.10.26 17:51l 왕익주 기자(dlrwn3@snu.ac.kr)

조회 수:106

  올해 10월 26일은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이었던 故이한빛 PD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되는 날이다. 방송 스태프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경종을 울린 그의 죽음 이후 2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업계의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23일엔 <tvN> 드라마 ‘화유기’ 촬영현장에서 한 스태프가 작업중 추락해 하반신마비 판정을 받았고, 지난 8월 2일에는 <SBS>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의 제작에 참여한 외주업체 프리랜서 스태프가 내인성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 5일간의 노동시간은 76시간. 故이한빛 PD를 자살로 내몬 방송제작의 ‘업계 관행’은 완고했다. 

  그럼에도 변화는 오고 있다. 故이한빛 PD의 이름을 기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한빛센터)’가 올해 1월 24일부터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유가족이 CJ E&M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방송업계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시민단체를 세우는 데 쓴 것이 기초가 됐다. 또, 지난여름엔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 지부 역시 설립됐다. 방송업계의 오랜 관행을 바꾸기 위해 이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방송 제작 환경 개선을 향한 첫걸음을 뗀 이들의 활동을 담았다.


개정된 근로기준법에도 변화 없는 노동시간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 지부(스태프지부)는 방송스태프는 물론 작가와 독립 PD까지 아우르는 국내 최초의 방송 스태프 노조다. 네이버 밴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스태프 협의회’에서 노조가 필요하단 문제의식을 공유한 이들이 모여 지난 7월 4일 설립했다. 김두영 스태프지부 지부장은 “1번 목표는 노동시간 단축”이라고 노조를 소개하며 노조원들과 모은 ‘드라마 제작현장별 촬영일지’를 꺼내 보였다. <SBS>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의 경우, 25번의 촬영 중 14시간 안에 촬영이 끝난 날은 이틀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6시간 10분에 달했다. 한편, <tvN> 드라마 ‘아는 와이프’의 스태프들은 종영분에 해당하는 회를 아침 7시부터 다음날 오후 3시까지 32시간 연속 촬영했다. 직전 3일간 각각 18시간, 16시간, 20시간 일한 뒤 이어진 촬영이었다.


사진1.jpg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 지부가 국회에서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오른쪽이 김두영 스태프 지부 지부장

ⓒ 뉴시스



  장시간 노동에 대한 규제는 불가능할까. 최근까진 근로기준법을 통해 촬영 현장의 장시간 노동을 규제할 수 없었다. 근로기준법 59조 상 특례업종(영화 및 흥행업)으로 분류됐던 방송업에선 근로자대표와 사용자 간의 합의를 통해 ‘상한 없는’ 연장근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3월 20일 영화 및 흥행업이 특례업종에서 제외됐다. 또한, 지난 7월 1일부터는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돼 1주당 노동 가능 시간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감소했다. 이러한 두 가지 변화를 통해 방송업계도 올해 연말까지는 주당 최대 68시간, 단축된 노동시간에 적응하기 위해 주어진 처벌유예 기간이 끝나는 내년 1월 1일부터는 주당 최대 52시간 근로라는 상한선을 적용받게 됐다.

  문제는 근로기준법이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개정됐음에도 현장에선 장시간 노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두영 지부장은 근로기준법 개정 이후에도 “1일 노동 시간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방송사와 제작사가 노동시간을 68시간에 맞추기 위한 자체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경우가 많음에도 “가이드라인을 따르기보단 편법적 인력 운용을 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그가 ‘편법’이라 꼬집은 인력 운용 방식에 대해 탁종렬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한빛센터) 소장은 <JTBC> 드라마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의 예를 들었다. 그는 “해당 드라마의 경우 A팀, B팀이 교대로 촬영을 진행했다”며 “한 팀에게 2~3일간은 강도 높게 일을 시키고 나머지 2~3일간은 무급으로 쉬게 한다"고 말했다. 한 촬영팀이 일주일의 절반만 일하게 해 스태프의 1일 노동 시간은 유지하고 주당 노동 시간만 68시간에 맞춘다는 설명이다. 탁 소장은 “하나의 작업 현장에서 일하는 스태프는 쉬는 날 다른 작업에 참여할 수 없는 만큼, 급여가 절반가량 줄었다”고 덧붙였다.

  특례업종 제외 등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근로기준법에 장시간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규정이 여전히 남은 것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근로기준법 51조의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대표적이다. 탄력적근로시간제란 일이 많은 주의 표준노동시간을 늘리는 대신 다른 주의 표준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다. 단, 특정한 ‘단위 기간’ 동안 평균한 주당 표준근로시간이 40시간을 넘어서는 안되고, 한 주의 표준근로시간은 4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이러한 조건 하에 단위기간을 2주로 할 경우, 한 주의 노동시간을 32시간으로 줄이고 다른 한 주의 표준노동시간은 최대 48시간까지 늘릴 수 있다. 이렇게 늘어난 표준노동시간 48시간에 연장근무 12시간을 더하면 한 주 최대 60시간의 노동이 합법화된다.


사진2.PNG

▲언론노조 SBS본부 노동시간 제보센터 카카오톡 오

픈 채팅방. 이곳 채팅방에선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에도 현장엔 아무 변화가 없다는 성토가 이어졌다.

ⓒ SBS 노보



  이처럼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하면 한 주의 노동 시간은 증가하지만 표준시간외 노동에 지급되는 가산수당은 줄어들 수 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하에선 특정 주의 표준근로시간 자체가 40시간에서 48시간으로 늘어나 가산수당을 받기 시작하는 시점이 늦춰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통해 한주의 표준노동시간을 48시간으로 늘릴 경우, 법정표준 시간인 40시간보다 8시간 많이 일해도 해당 8시간에는 가산수당이 지급되지 않는다. 법률상담 시민단체인 ‘방송계갑질 119’의 김유경 노무사는 방송사의 제작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이 도입되면 “특정 주에 특례 업종시절과 유사한 수준으로 노동시간이 집중되고, 가산수당은 받지 못하는 ‘공짜노동’이 늘어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김두영 지부장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현행 주 총량제가 아닌 '일일 노동시간 총량제'를 표준으로 할 것"을 제시했다. 하루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을 고정해 사측이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으로 시간을 연장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노동자성 인정 가로막는 턴키계약,
개별계약으로 풀어야

  노동시간을 근로기준법에 맞게 단축하는 것이 스태프 노동환경 개선 운동의 한 축이라면, 또 다른 축은 이들이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스태프의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간 스태프는 통계약의 한 형태인 ‘턴키계약’으로 인해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일괄도급계약으로도 불리는 턴키계약의 과정은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방송사가 프로그램 제작을 외주제작사에 납품하면 외주제작사는 조명·동시녹음·장비·미술 등 각 직군 감독을 도급 계약을 통해 모집한다. 이때 감독은 자신이 맡은 부서의 스태프를 직접 모집해 제작에 참여한다. 이렇게 제작에 참여한 스태프들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4대 보험을 적용받지도 않는다. 일급으로 받는 급여 역시 개인이 아닌 팀별로 책정된다. 이처럼 방송사와 제작사는 일반 스태프가 아닌 감독급 스태프와 사업자 대 사업자로서 계약함으로써 사용자의 책임을 피할 수 있다.


사진3.PNG

▲고용노동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구성한 턴키계약의 구조. 연출, 촬영, 제작 등 일부 직군을 제외한 직군에센 개별 계약이 아닌 팀별 계약이 이뤄지고 있다.



  김두영 지부장은 턴키계약으로 인해 “방송사가 갑이라면 제작사는 을, 감독급은 병, 우리 스태프는 정”이 된다 말한다. ‘정’인 스태프는 근로기준법이 규정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누릴 수 없다. 연장 가산 수당이 대표적인 예다. 김두영 지부장은 “촬영 현장을 오가는 시민들이 돈 많이 받아서 좋겠다고 말을 건네지만, 이는 오해”라며 “일급제 하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은 하루 8시간 일해도 20시간 일해도 똑같은 임금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부당하다고 여긴 감독이 조수 인건비 계약을 따로 하겠다고 하면 제작사 측은 일단 ‘알겠다. 다음에 연락하겠다’고 말한다. 그럼 끝이다. 일을 못하는 거다”라며 스태프 임금에 대한 보호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노조 차원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 법무팀이 그동안의 계약서와 각 직군의 직급별 임금 내역을 수합하고 있다”며 “연말까지 표준계약서를 만들고 직급별 표준인건비를 산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조가 마련한 표준계약서를 통해 모든 스태프가 개별계약을 하면 턴키계약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노동인권 개선의 실마리가 될 노사 소통

  스태프지부가 노동시간 단축과 개별계약 체결을 목표로 활동하는 동안 한빛센터는 노사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탁종렬 한빛센터 소장은 <tvN>의 모기업인 CJ E&M의 제작환경 가이드라인 제작에 한빛센터가 참여한 것을 예로 들었다. “평소 제보 등을 통해 연락하던 스태프들에게 CJ E&M이 제시한 초안을 전달하면 ‘이 부분은 절대 수용하면 안 된다’ 등의 피드백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한빛센터는 방송사의 가이드라인에 스태프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스태프 제보를 바탕으로 방송사에 촬영 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것도 한빛센터의 활동 중 하나다. “올해 4월까지만 해도 제보 접수가 별로 없었다”고 운을 뗸 탁종렬 소장이 공개한 스태프제보엔 촬영의 시작 및 종료 시각, 식사 시간 등에서 방송사측이 제작현장 가이드라인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빼곡했다. 탁종렬 소장은 “늘어난 제보를 바탕으로 방송국 드라마국장과 통화해서 시정을 요구하고 사과를 받아내는 일도 잦아졌다”고 밝혔다. 그는 “스태프가 제작 일정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도, 담당 PD가 노동 시간 연장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사과하는 일도 전에 없던 문화”라며 조금씩 변화하는 현장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또한, 그는 현재 스태프의 요구사항이 주로 제보를 통해 반영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노사 간의 직접적인 소통이 일상적인 수준까지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촬영현장에서의 직접적인 소통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한빛센터의 노력은 ‘스태프 협의체’의 구성으로 이어졌다. 스태프 협의체는 CJ E&M의 자회사인 제작사 ‘스튜디오 드래곤’과 제작 현장의 스태프 간의 공식적인 대화 창구가 될 예정이다. 탁 소장은 “이한빛 PD 사망 이후 CJ E&M 측과 유족들은 몇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며 “이를 근거로 제작사 측과 협상할 수 있었다”고 스태프 협의체 구성의 배경을 밝혔다. 그가 언급한 합의에는 CJ E&M이 제작환경 개선에 앞장서며, 스태프들과 소통을 강화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탁 소장은 “앞으로 노사는 물론 정부까지 포함된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동 환경을 개선할 수 있길 바란다”며 사회적 협약을 이뤄낸 영화 산업계를 참고사례로 제시했다. 영화제작 환경은 한때 방송제작 환경과 다를 바 없이 열악했다. 방송업과 마찬가지로 근로기준법 상 특례업종에 포함됐던 영화산업에서도 장시간 노동이 업계 관행이었다. 스태프와 제작사가 개별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러나 2005년, 전국영화산업노조(영화노조)가 생기며 판이 바뀌기 시작했다. 영화노조 이상길 수석부위원장은 “노조가 제작사 협의회, 투자사와 유관 부처를 찾아다니는 등 노사정 테이블을 구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통해 개별계약서 작성을 업계 표준으로 하는 노사정 협약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개별계약을 통해 스태프를 근로기준법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영화노조는 ‘근로자대표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이 부위원장은 “근로기준법 상 노동시간 연장은 근로자대표와 서면 합의를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촬영현장별로 근로자대표를 둬 일방적인 노동시간 연장을 막을 수있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영화계는 개별계약을 통해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근로자대표제를 활용하며 근로기준법의 특례업종에서 제외되기 전부터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방송은 나가야 할 것 아닌가” 묻기 전에

  영화노조 이상길 수석부위원장은 “(영화계에서) 사회적 협약이 구속력을 갖게 된 데는 CJ 등 대형 투자사가 참여한 것이 주요했다”고 말한다. 자금을 가진 투자사가 제작사에 개별계약을 요구하자 제작사는 이를 준수할 수밖에 없었단 설명이다. 하지만 방송 제작 업계에서 투자사에 해당하는 방송사가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김두영 지부장은 회의적이다. 그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주도해 구성한 ‘방송제작환경개선 TF'에 노조, 제작사, 유관 부처가 모두 참여할 때 방송사는 한 곳도 참여하지 않았다”며 방송사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또 다른 스태프지부 관계자는 방송사 측에 노동시간에 대한 약속을 준수하지 않은 것을 항의하자 “우리가 임금을 주고 시키는 일이다. 방송은 나가야 할 것 아닌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토로했다. 


사진5.jpg

▲김두영 스태프지부 지부장이 한 촬영 현장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 지부



  김두영 스태프지부 지부장은 “최종 사용자나 다름없는 방송사와 원만한 합의를 하는 것이 노동환경 개선의 관건”이라며 방송사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방송사가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에 의존하기보단 근무 시간을 실질적으로 단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노조 차원에서 각 방송사를 면담하며 제작환경 개선을 약속하는 공문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개선의 주요 내용은 최소한 자정 전에는 촬영을 종료하자는 것. 그는 “일부 촬영장은 자정 전까지 촬영을 끝내는 등 개선이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촬영장이 종영에 가까워지면 자정을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스태프지부는 해당 촬영장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통해 촬영을 중단시키고, 담당자에게 노사 간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완고했던 관행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오늘날, 스태프들이 땀흘려 제작한 콘텐츠로 수익을 올리고 뉴스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고발하는 방송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