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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지만 함께하지 못했다 크레이그 맥닐 감독의 '리지'(2018)
등록일 2019.04.17 22:27l최종 업데이트 2019.04.19 10:41l 최재혁 기자(coliu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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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89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든 가족의 집에 브리짓이란 이름의 하녀가 새로 일하게 된다. 브리짓이 안내받은 방에 짐을 푸는 새 집안의 둘째 딸 리지가 들어온다. 리지는 브리짓에게 방이 작지 않냐며 말을 건다. 방이 꽤 아늑하다고 소개한 리지의 새엄마 애비와는 다른 반응이다. 잠시 뒤 리지가 먼저 자신을 소개한다. 브리짓이 애비에게 교육받은 대로 자신을 본명 대신 ‘매기’라고 부르자 리지는 가볍게 화를 낸다. “매기니 패디니 그런 이름은 집어치워요. 아무렇게나 지어준 이름을 쓰려는 거예요?” 낯선 공간에서 브리짓이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는 처음부터 분명해 보인다.



서로에게 의지하다


  리지를 제외한 브리짓의 주변 상황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리지의 아버지 앤드류는 모두가 잠든 밤에 브리짓을 반복적으로 강간한다. 고향에 있는 브리짓의 어머니마저 그녀가 떠난 새 죽는다. 그동안 브리짓을 향한 리지의 친절은 계속된다. 리지는 학교를 중간에 그만둔 브리짓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 준다. 자신이 갖고 있던 시집을 선물로 주면서 초보자가 읽기 좋은 시를 표시해 놓는 세심함도 잊지 않는다. 어느새 브리짓에게 리지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아픔까지 공유할 수 있는 상대가 된다. 자신의 이름 철자도 모르지만 브리짓은 리지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남긴다.


  둘의 관계는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브리짓이 리지에게 의지하는 만큼 리지 역시 마음을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명문가의 딸이라는 이유로 리지는 극장에 혼자 가는 것조차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불규칙적으로 일어나는 발작 증세 역시 그녀를 옥죈다. 의학적인 치료 방법이 마땅치 않은 19세기에 의사는 앤드류에게 리지를 시설에 보내야 한다고 권한다.


  오히려 상대방을 더 필요로 하는 쪽은 브리짓이 아니라 리지에 가까워 보인다. 앤드류는 병을 이유로 리지를 노골적으로 비난한다. “너 때문에 우리 가족이 조롱거리가 된 거야.” 집에 계속해서 날아오는 협박 편지에 대한 그녀의 염려도 무시한다. 리지가 가족을 향한 위협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거짓으로 도둑 소동을 일으키자 그의 폭력은 절정에 달한다. 그는 리지가 기르던 새를 죽여 저녁식사에 내놓게 한다. 마음의 안정이 돼줘야 할 가정마저 또 다른 폭력으로 작용하자 리지의 마음은 집 밖으로 향한다. 정원에 자리한 그녀만의 은신처, 그리고 그곳에 있을 브리짓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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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가 기르던 새를 죽이려 하는 앤드류 ⓒ영화 ‘리지’ 공식 스틸컷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못하게 할게요.”


  리지와 브리짓의 관계는 결국 사랑으로 바뀐다. 둘은 정원의 은신처에서 서로를 애무한다. 그러나 해방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앤드류는 브리짓을 해고하고 리지를 의사의 조언대로 시설에 보내려 한다. 리지는 마침내 깨닫는다. “오랫동안 나 자신을 속여 왔어요.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믿었죠. 하지만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부모를 죽이고 브리짓과 함께할 계획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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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기르던 새를 죽이는 앤드류를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리지 ⓒ영화 ‘리지’ 공식 스틸컷



  살인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몇몇 정황 역시 리지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관객들이 이제 둘이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기대하려던 찰나에 영화의 흐름이 바뀐다. 브리짓이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던 리지를 찾아간다. 그녀는 리지에게 묻는다. “원하는 게 뭐에요?” 이상한 질문이다. 리지는 당연한 대답을 한다.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돌아오는 브리짓의 말은 냉정하다. “꿈을 꾸시네요. 그건 꿈에 불과해요. 불가능한 거 알잖아요.”


  화면은 살인 당일인 1892년 8월 4일로 전환된다. 계획과 달리 브리짓이 앤드류 앞에서 도끼를 들고 주저하자 리지가 나타나 살인을 매듭짓는다. 잠시 뒤 리지는 외부인이 침입한 양 비명을 지르며 브리짓을 부른다. 그녀는 브리짓에게 어서 가서 경찰을 부르라고 외친다. 브리짓은 움직이지 않은 채 리지를 바라본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는 눈빛이다. 감옥에서 둘의 대화는 앞으로 자신을 찾거나 편지도 쓰지 말아달라는 브리짓의 간청으로 끝난다.



계급이라는 굴레


  둘이 함께하지 못한 이유를 영화는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추측은 가능하다. 마지막 감옥 장면 전까지 리지와 브리짓이 다투는 모습은 딱 한 번 나온다. 앤드류가 브리짓을 강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리지는 밤에 그가 나올 문 앞에 유리 조각을 깔아놓는다. 다음날 브리짓은 리지에게 말한다. “이곳을 떠나면 보든 씨가 추천서를 써줄까요? 새 일자리를 찾아줄 거라 생각해요?” 이어지는 브리짓의 “나라고 좋아서 여기 있겠어요?”라는 힐난은 그녀와 리지 사이에 존재하는 신분 차이를 환기한다.


  브리짓이 리지와 동등한 지위가 아니라 엄연히 ‘하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영화 전반에서도 은연중에 드러난다. 가짜 도둑 사건이 벌어졌을 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가장 먼저 브리짓을 의심하며 그녀에게 방을 뒤져도 되냐고 묻는다. 앤드류가 리지의 새를 죽였을 때 또한 그녀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리지의 접시에 새 요리를 내려놔야 하는 사람일 뿐이다. 리지에게는 브리짓이 사실상 유일한 탈출구였던 것과 달리, 브리짓에게도 리지와의 관계가 기존의 질서를 부술 만큼 절박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리지의 선택은 그녀 자신에게 절반의 자유를 가져왔다. 정원으로 나와 빛을 한가득 받는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듯 살인은 분명 그녀를 앤드류의 어두운 가정에서 해방시켰다. 하지만 브리짓은 끝까지 리지의 곁에 남아 있지 못했다. 브리짓은 끝내 감옥의 리지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떠났다. 무엇이 이들을 함께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남은 고민은 오늘날 감상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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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리지와 브리짓 ⓒ영화 ‘리지’ 공식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