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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말하는 증언, 채워 나가는 역사 서울도시건축센터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展’
등록일 2019.04.18 16:07l최종 업데이트 2019.04.19 10:43l 최재혁 기자(coliu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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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도시건축센터에서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전시가 열렸다. 서울시와 서울대학교 정진성 연구팀(연구팀)이 공동으로 주관한 이번 전시는 ‘위안부’와 관련된 연구 성과를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피해자들의 ‘기억’과 문서화된 ‘기록’ 사이의 가교 역할을 자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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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들의 이동 경로가 표시된 지도



모두가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벽의 한 면을 가득 채우는 지도를 보게 된다. 이후 전시에서 다뤄질 ‘위안부’ 각각의 이동 경로가 표시된 지도다. ‘위안부’가 머문 지역은 가깝게는 일본부터 멀게는 인도에 이른다. 전시의 도슨트는 일본군의 이동과 전후 포로 수용에 따라 이뤄진 ‘위안부’의 지난한 여정을 두고 피해가 단일한 장소서 벌어졌다는 통념을 깨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도 옆으로 이동하면 바로 전시의 1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1부는 미얀마의 도시 미치나(Myitkyina)서 ‘위안부’ 생활을 한 여성들의 삶을 당시 연합군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한다. 일본군이 패퇴하자 현지에 남아 있던 ‘위안부’들은 연합군의 포로가 됐다. 연합군은 이들이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판단해 심문을 진행했지만, 한편으로 일부 군인들은 이들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보내기도 했다. 일례로 ‘위안부’의 심문 책임자였던 원-로이 챈 대위는 그의 회고록에서 ‘소녀들이 인도로 떠나기 전날 밤은 우리가 위안부들을 위안할 차례였다’고 적고 있다. 연합군의 복합적인 태도는 그들이 남긴 사진과 문서에 고스란히 담겼다.


  연합군의 기록 위주인 1부의 구성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44년 8월 10일 최종적으로 포로가 된 조선인 여성 20명 중 아무도 전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세상에 나와 자신이 당한 폭력을 고발하지 않은 그들의 마음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관람객은 함께 전시된 최찬숙 작가의 영상 작품 ‘밋찌나’를 통해 그 이유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작품은 미치나 ‘위안부’의 삶을 반영한 대본을 바탕으로 세 명의 젊은 여성 배우가 ‘위안부’ 역할을 맡아 증언하는 모습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세 여성은 ‘일본군이 수류탄을 강에 던져 물고기를 잡았다’는 등 경험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을 내용을 말하기도 한다. 동시에 이들은 몇 십 년 전 일을 떠올리기 힘들다는 말을 직접 꺼내거나, 강물이나 달빛을 본 기억에 오래 머무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찬숙의 작품은 설령 증언의 목적이 명확하다고 해도 당사자가 과거의 고통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시킨다.


  2부 ‘중국 윈난성 전투의 끝자락’은 박영심을 중심으로 ‘위안부’ 여성의 경험에 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중국 난징으로 끌려간 그는 전쟁 막바지엔 중국 윈난성 송산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1998년 박영심은 일본군이 군기를 태우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패배를 직감해 동료 여성과 탈출을 감행했다고 증언한다. 탈출에 성공해도 안심할 순 없었다. 그는 기나긴 이송 과정을 거쳐 쿤밍 포로수용소에 머물러야 했다. 박영심의 행적은 ‘위안부’ 문제가 격렬한 전쟁 현장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관람객에게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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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심과 윤경애의 사진과 검은 판 21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쿤밍 포로수용소에는 23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지만 전후 생존 및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박영심과 윤경애 뿐이었다.



말해지지 않은 삶을 말하기


  박영심의 이야기는 그의 증언을 통해 재현될 수 있었지만 다른 ‘위안부’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수용소엔 총 23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지만 전후 생존과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박영심과 윤경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은 21명의 삶에 대해선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3부 ‘‘트럭섬’ 사진이 말을 걸다: 이복순과 축섬의 조선인 ‘위안부’’는 증언하지 못한 삶을 복원해낸 하나의 사례다. 중부 태평양에 위치한 축섬은 과거 일본과 한국에선 ‘트럭’ 내지 ‘도라쿠’라고 불렸다. 이복순 역시 자신이 ‘도라쿠도’에 끌려갔다고 증언했지만 당시엔 지명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도라쿠도’의 위치는 이복순의 생전에 밝혀지지 않았다. 이복순은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진 채 2008년에 별세했다.


  이복순의 행적을 밝힌 것은 이날 전시를 기획한 연구팀이었다. 연구팀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이복순의 행적을 밝혀낸다. 시작은 2017년 7월 발견한 미군의 작전일지였다. 일지의 기록 중엔 축섬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있었다. 연구팀은 이 사진들 중 하나에 찍힌 인물이 이복순임을 양아들을 통해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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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순의 행적을 밝혀내는 과정이 정리돼 있다.



  이복순의 행적을 보다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다음으로 분석해야 할 자료는 2006년 8월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귀환선 명부였다. 축섬에서 일본으로 돌아오는 귀환선 명부에는 신분을 노동자로 표기한 조선인 여성 26명이 있었다. 모두 일본식 이름으로 작성된 명부였다. 연구팀은 이복순과 관련된 호적을 몇 대에 거쳐 거슬러 올라 이복순의 일본식 이름이 ‘히토가와 후쿠준’임을 찾아냈다. 축섬의 조선인 여성 26명 중 한 명과 일치하는 이름이었다. 연구팀이 자료를 모아 나가는 과정 끝에 나란히 걸린 작전일지 속 이복순의 모습과 이복순의 생전 모습이 같음을 확인할 땐 일말의 통쾌함마저 느껴진다.


  이처럼 3부는 전시 전체를 통틀어서 연구자의 노력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방향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3부는 이러한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두 편의 기사를 통해 또 다른 문제의식을 던진다. 그 중 첫 번째 기사인 1946년의 ‘뉴욕 타임스’는 여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다른 조선인들에게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했다는 축섬 사령관의 말을 인용한다. 같은 시기의 한국 기사는 축섬에서 조선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지만 그곳에 ‘위안부’ 여성은 기록되지 않았다. 여성들이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았다는 전시의 설명은 이들이 느꼈을 고립감을 시사한다.



‘피해자들의 아픔을 나누며’


  자연히 4부 ‘살아남았으니 살고자 했다’는 생존자와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다. 4부가 조명하는 중심인물은 오키나와서 ‘위안부’ 생활을 한 배봉기다. 전후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던 그는 귀국하지 않았다. 고국은 그가 위안부 생활을 했음을 오랫동안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경위는 1975년 일본 정부에 오키나와 체류 허가 신고서를 제출하면서부터였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한국에서 살았지만 애착을 가질 만한 집과 재산이 없었고, 이별을 아쉬워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다’는 배봉기의 증언엔 고향에 대한 소속감의 부재가 묻어난다.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지만 오키나와에도 안착하지 못하던 배봉기의 마음은 오키나와의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조금이나마 변화했다. 전시는 주변 사람들과 꾸준히 대화하며 그가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배봉기의 사진엔 그가 생존 후 살아오며 쌓인 울분과 억울함의 이유를 주민들과 대화하며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 함께 제시됐다.


  오랫동안 잊힌 그의 삶은 사진 한 장에 그치지 않았다. 2014년엔 《빨간 기와집》이란 제목으로 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던 그를 지속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단순히 배봉기에게 인도적인 친절을 베푸는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한 예로 오키나와 미야코섬에는 ‘위안부’ 피해자를 추모하는 ‘아리랑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 적힌 비문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에 따르는 성폭행이 그칠 것’을 요구함으로써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기억을 보다 넓은 범위로 확대한다. 이러한 태도는 오키나와의 지리적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오키나와는 전쟁 중 지상전을 위해 좁은 영토에 비해서 과도한 군 주둔과 위안소 설치를 경험했다. 종전 후엔 미군 주둔에 따른 범죄에 노출됐다. 짙었던 전쟁의 상흔은 주민들과 ‘위안부’ 피해자를 묶는 원동력이었다.


  전시관의 끝엔 ‘기록 기억’의 형태에 맞춰 포스트잇을 붙일 수 있는 벽이 마련돼 있었다. 관람객은 각자 응원의 글을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포스트잇 덕분에 기자가 전시를 찾았을 땐 이미 애초에 기획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포스트잇은 ‘위안부’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촉구하는 운동이 당사자를 넘어 이후 세대의 목소리를 통해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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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끝에 시민들의 포스트잇이 가득 붙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