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호 > 사회 >기억은 권력이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지워진 존재들 민간인 지뢰피해자가 살아온 고통의 역사
등록일 2019.04.19 01:56l최종 업데이트 2019.05.10 19:44l 김혜지 기자(khg664256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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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뢰는 평화로운 마을에 남아 전쟁의 상처를 남긴다. 지뢰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한국의 민간인 피해자 수는 천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는 608명이다. 이들 중 239명은 사망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국가의 무책임 속 오랜 시간 방치돼왔다. 민간인 지뢰피해자를 만나 그들의 삶에 각인된 고통의 역사를 들었다.



지뢰 사고, 그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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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지뢰피해자 김종수 씨



  봉천역 인근에서 23년간 구둣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종수 씨는 1976년 11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동막동 인근 야산에서 지뢰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었다. 당시 17살이던 김 씨는 형, 마을 친구들과 땔감용 나무를 구하기 위해 첫눈이 오는 날 뒷동산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음과 함께 김 씨는 쓰러졌다. 그는 늘 오르던 그곳에서 발목을 공격 대상으로 하는 지뢰를 밟았다.


  김 씨가 살던 해안면은 주민 1,700여 명 가운데 55명이 지뢰 사고를 겪은 지역이다. 면 단위의 작은 지역에 이렇게 많은 지뢰 사고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될 당시 휴전선 양쪽 4km 선 안쪽은 비무장지대(DMZ), 그로부터 3~30km는 민간인통제선(CCL, 민통선)으로 설정됐다. 한국전쟁 동안 비무장지대뿐만 아니라 민통선 내부에도 많은 지뢰가 매설됐기 때문에 이 지역의 민간인 출입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하지만 휴전상태가 지속되자 정부는 60년대 초반부터 황무지 개간을 위해 정책적으로 민통선 내에 사람들을 입주시키기 시작했다. 김종수 씨의 가족도 소양강 댐으로 인해 집이 수몰되면서 해안면에 이주하게 된 경우였다. 김 씨는 “예전에는 지뢰밭이 표시된 곳이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표시되지 않은 지뢰지대에 이주민들이 땅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지뢰 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지뢰 피해가 60년대에 특히 많았던 이유다.


  민통선 지역에서 지뢰 사고가 나면 피를 흘리다 죽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병원이 없어 의료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김종수 씨는 “사고 당시 해안면에는 자동차가 한 대밖에 없었다”며 이조차 없었을 때는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해 살아남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지뢰 사고가 나면 주변에도 지뢰 매설 가능성이 있기에 민간인이 수습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군이 사고자를 수습하거나 호송한 경우는 드물었다. 김종수 씨는 다행히 제 시간에 이송돼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삶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퇴원 후 일 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지내던 김 씨는 무작정 서울에 와 직장을 구했다. 의족을 맞추기 전까지는 직원들이 보기가 안 좋다며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병신’과 같은 말을 들으며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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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지뢰피해자 이영식 씨



  강원도 화천에 거주하는 이영식 씨는 양구군에 위치한 파로호에서 유실된 지뢰로 인해 1980년에 사고를 당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이 씨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던 파로호에 누나가 빨래를 하러 가자 동생과 함께 따라 나섰다. 장마철에 떠내려 온 쓰레기 더미에서 동생이 조그만 플라스틱 모형을 주웠다. 이 씨가 장난감인 줄 알고 동생이 주운 것을 뺏는 순간 지뢰가 터졌다. 지뢰 사고는 그의 두 손과 왼쪽 눈을 앗아갔다.


  이영식 씨는 끝이 뭉툭한 두 팔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가족에 모든 것을 의지해야 했다. 그러다 점차 양은을 구부리거나 고무줄을 팔에 감아 밥을 먹는 등 스스로 생활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힘들었던 때를 묻자 이 씨는 의수를 하게 되면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는 꿈이 깨졌을 때라고 답했다. 그는 의수가 불편해서 벗어 던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휩싸였었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사고의 원인을 몰랐던 이 씨는 한참 후에야 유실된 지뢰를 알리는 전단지에서 똑같은 플라스틱 모형의 사진을 발견했다. 그는 “이게 지뢰라는 걸 그때 알았다”고 회상했다. 김 씨에게 피해를 입힌 M14 플라스틱 대인지뢰는 가벼워서 수백 킬로미터까지 물에 떠내려가기도 하며, 금속성이 거의 없어 최신형 탐지기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이후 ‘평화나눔회’)가 2006년 강원도 지역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뢰피해자의 약 30%는 M14 지뢰로 인해 사고를 당했다.


  67년 이후의 민간인 지뢰피해자는 국가배상법에 의해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군에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김종수 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뢰피해자들은 이를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군이 민통선 지역의 사람들에게 입주와 출입영농증 발급 당시 불법적인 각서를 쓰게 했기 때문이다. 각서는 이주민들의 민통선 지역 내 거주와 영농을 허락하는 대신 폭발물 사고가 났을 경우 이들이 군부대나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민통선 지역 피해자들이 각서로 인해 배상청구권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배상청구권을 알게 되더라도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국가배상법에 따르면 피해자는 사고 후 3년 이내에만 배상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영식 씨도 뒤늦게 국방부에 문의했으나 시효가 지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배상을 받아야 할 민간인 지뢰피해자는 오히려 처벌의 대상이었다. 김종수 씨는 군에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군사지역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처벌하는 경우를 종종 봐왔기에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평화나눔회 조재국 이사장은 지뢰 사고는 관할 군부대의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주는 사건이었기에 군은 지뢰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려 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지뢰 사고가 난 직후 해당 지역에 군이 철조망을 친 뒤 이전부터 지뢰지대 표식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지뢰피해자가 배상문제를 제기하면 군에 의해 민통선 출입이 차단돼 마을 주민들에게 경제적 피해가 갈 수 있었다. 이는 지뢰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회적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서울대 조동준 교수(정치외교학)의 설명이다.



지워진 존재가 드러나다 


  민간인 지뢰피해자는 살아남아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겪었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는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지워져왔다. 조동준 교수는 “지뢰피해자가 감춰져 있었던 건 사실이다”며 민간인 지뢰피해자 문제가 신문에서 1975년 이후 완전히 사라진 사실을 지적한다. 지뢰피해자 문제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92년까지 17년 동안 매년 민간인 지뢰 피해 사건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피해자가 지워진 이유를 조 교수는 지뢰가 국가 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시각 때문이었다고 분석한다. 북한의 공격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지뢰를 ‘효과적인 방어 무기’로 보았다는 설명이다. 지뢰의 효과성에 대한 국가의 선전이 이뤄지면서 민간인 지뢰 피해 문제는 자취를 감췄다.


  이러한 인식 하에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지뢰 매설은 계속됐다. 냉전기였던 1960년대 초 쿠바사태 직후에는 미군이 민통선 지역에 지뢰를 집중적으로 매설했다. 한국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유치한 88년까지는 국군에 의해 전국 36개 방공기지에 지뢰가 매설됐다. 서울 예술의전당 바로 뒤에 위치한 우면산, 부산 태종대 옆 중리산 등 산책로나 관광지 근처에도 마찬가지로 방공기지와 지뢰지대가 존재한다. 이는 후방지역에서도 민간인 지뢰 피해가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다. 2000년대 전까지 한국에 매설된 지뢰의 총량은 100만 개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느 위치에 지뢰가 몇 발이 있는지 파악 가능한 ‘계획지뢰지대’보다, 지뢰가 매설됐다고 주민들이 증언하거나 지뢰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자료가 없는 ‘미확인지뢰지대’가 월등히 넓다. 2015년 11월 국방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확인지뢰지대는 216개소에 9283만㎡로, 계획지뢰지대의 4.5배 수준이다. 조재국 이사장은 미확인지뢰지대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철조망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며 이로 인해 사고를 당하는 피해자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지뢰를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민간인 지뢰피해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민간인 지뢰피해자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건 1990년대의 전 세계적인 지뢰금지운동의 흐름에서 비롯됐다. 1997년은 국제지뢰금지운동(ICBL)과 이 단체의 대표인 조디 윌리엄스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대인지뢰금지조약(Mine Ban Treaty) 조인식이 열린 해였다. 이 조약에서 한국 정부는 ‘한국에는 민간인 지뢰피해자가 없고 지뢰를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으므로 통일이 될 때까지 지뢰의 제거를 유예해 달라’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다.


  한국의 시민사회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997년에 시민사회 28개 단체가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CBL)를 결성했다. 결성 당시부터 참여한 조재국 이사장은 대책회의의 최우선 과제가 “세계에 한국에도 지뢰피해자가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책회의에서는 대인지뢰금지조약의 조인식에 시민 대표를 파견하여 노벨 평화상 수상자 조디 윌리엄스를 초청했다. 1998년 2월 윌리엄스가 한국을 방문해 피해자를 만나면서 한국의 민간인 지뢰피해자 문제가 세상에 극적으로 드러났다. 이후 대인지뢰대책회의는 민간인 지뢰피해자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지뢰 문제 조사를 통해 후방지역 지뢰 제거를 이끌어냈다. 나아가 ‘지뢰피해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지뢰피해자와 함께 운동해왔다.



지뢰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한국 사회 


  민간인 지뢰피해자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14년 제정된 지뢰피해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은 위로금액 산정 기준을 사고 당시 평균임금으로 설정했다. 이로 인해 1953년경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당시 월평균임금이었던 1,100원을 적용 받아 지금까지의 위로금을 다 합산해도 총액이 수십만 원에 지나지 않는다. 지뢰피해자의 70% 이상은 1970년대 이전에 사고를 당한 사람들인데, 당시의 월평균임금이 현저히 낮아 실효성 없는 법안이 돼버린 것이다. 오히려 임금이 급격히 상승한 80년대 이후의 피해자가 오래 전에 사고를 당한 피해자보다 위로금액이 커 형평성 문제가 제기됐다. 2016년 일부개정안이 통과됐지만 2천만 원 이내에서 조정될 수 있도록 바뀌었을 뿐,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실질임금의 반영’과는 거리가 멀다. 김종수 씨는 몇 년마다 바꿔야 하는 의족을 한 번 맞추는 데에만 350만 원이 드는 것을 감안하면 위로금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피해자 지원을 심의·의결하는 심의위원회가 대상자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선정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는 심의위원회가 국방부장관 소속으로 돼있어 군과 공무원 출신 인사들이 대부분이라는 점과 관련 있다. 심의위원회에 참여해온 조재국 이사장은 군 출신 관계자들은 오랫동안 ‘민간인 피해자들은 불법적으로 지뢰지대에 들어와서 사고를 당한 것이므로 보상할 수 없다’고 믿어왔기에 설득에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의 소극적인 홍보로 인해 수많은 지뢰피해자들이 특별법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접수 기한이 끝난 문제점도 있었다. 2016년에 박주민, 김병기 의원이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예산을 문제 삼은 국방부의 반대로 계류 상태가 지속됐다. 결국 지난 3월 28일 기한을 연장하는 부분만 국회를 통과했다.


  미확인지뢰지대의 지뢰 제거 문제도 해결이 요원하다. 2015년 11월 국방부 소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미확인지뢰지대 3000만 평 중 한 해 제거 작업이 이뤄지는 범위는 10만 평에 해당한다. 이 자리에서 국방부 측은 미확인지뢰지대 지뢰 제거에 ‘자체적으로는 300년이 걸린다’고 언급했다. 조재국 이사장은 “한국에 지뢰를 제거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돼있지 않은데, 이는 국가 안보에 있어 민간인들의 사고까지 방지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쓸 수 없다는 기본적인 사고가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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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 지뢰지대는 군에서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제거 작업을 실행했지만 회수하지 못한 지뢰가 많아 ‘과거 지뢰 지대’라는 표지판을 설치했다. ©평화나눔회



  비인도적 무기의 전형으로 국제적인 금지 대상이 된 지뢰가 북한의 남침을 막는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라는 믿음이 한국 사회에선 여전히 굳건하다. 그리고 민간인이 ‘무단’으로 지뢰지대에 들어갔다는 낙인은 간편하다. 지뢰의 뇌관은 누구를 향하는가. 지뢰는 적과 나,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고 수많은 민간인 피해자들을 양산해왔다. 그리고 그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한국 사회에서 지워졌다. 이들의 목소리가 드러난 지금, 민간인 지뢰피해자 문제를 외면해온 오랜 역사가 끝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