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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공동체 성미산마을 속으로
등록일 2019.04.19 11:27l최종 업데이트 2019.04.19 12:26l 김혜지 PD(khg664256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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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속에 마을이 있다. 봄 햇살이 가득한 3월의 어느 날, 서울 마포구에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성미산마을의 사람들을 만났다. 성미산마을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성미산마을은 해발 66미터의 작은 뒷동산인 성미산(성산)을 품고 있는 마을이다. 망원역에서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성미산마을은 행정구역상의 명칭은 아니지만,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를 부르는 말이다. 성미산마을은 성산동, 서교동, 망원동, 연남동 일대에 걸쳐있다.


  성미산마을의 시작은 1994년 공동육아를 위해 모인 사람들로부터였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는 성미산 자락에서 처음 시작된 사업이 공동육아협동조합의 어린이집을 만든 것이다. 부모들이 직접 돈을 모으고 운영에 참여하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당시 전국적으로 첫 시도였다.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공동 프로젝트는 꾸준히 늘어났다.


  아이 키우기 중심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점점 어른들의 삶을 가꾸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풍물패, 목공반, 여성모임 등 다양한 동아리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성장해 어린이집을 졸업하면 사라질 관계가 아니라, 지역으로 확장된 안정적인 관계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마포두레생협’이 설립됐다.


  사람들의 공동체에 ‘성미산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계기는 성미산 개발 계획에 맞선 주민들의 반대 운동이다. 2001년 성미산을 배수지로 개발하겠다는 서울시의 계획이 발표되면서 마포두레생협을 중심으로 ‘성미산을 지키는 주민연대’가 결성됐다. 주민들은 2년 동안 성미산을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서고 공사 시도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결국 서울시에 추가적인 배수지가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2003년에 계획이 중단됐다. 이러한 활동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성미산마을이라는 명칭이 생겨났고 마을 사람들은 ‘함께 해보니 되더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 후 성미산마을에는 굵직한 공동체 사업들이 진행됐다. 사람들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이어 ‘성미산학교’라는 대안학교를 만들었다. 마을 안팎의 예술 공동체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인 ‘성미산마을극장’이 세워졌고, 공동체 주택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는 1호에서 시작해 6호까지 지어졌다. 현재 성미산마을을 구성하는 공동체는 70여 개에 달한다. 물론 필요를 느낀 당사자들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어도, 공동체 내부의 이견이나 현실상의 어려움으로 해소되기도 한다. 하지만 삶에서 힘든 문제를 함께 해결하자는 마을의 지향은 뚜렷하다. ‘우정과 환대의 마을공동체’를 꿈꾸는 성미산마을의 사람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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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산마을 초입에는 마을회관이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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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산을 오르면 새들을 위해 설치된 먹이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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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산학교를 소개하는 김명집(가림토) 씨 ⓒ여동준 사진기자



Q. 어떤 계기로 성미산마을을 터전으로 삼으셨나요?


A. 성미산학교를 만든다고 신문에 난 공고를 보고 마을에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산을 깎으면 ‘깎나보다’하고 남의 일처럼 그냥 지나가잖아요. 근데 성미산마을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던 거죠. 주민들 동의 없이 갑자기 산을 훼손하고 깎고 하니까 다 같이 산에 올라가서 맞서 싸웠어요. 그 사람들이 합심해서 대안학교를 만든다고 하니 믿음이 가서, 그 믿음만으로 성미산마을에 왔습니다. 제 아이는 성미산학교를 만들 때 1학년으로 들어갔어요.



Q. 성미산학교를 처음 만들 때 사람들은 어떤 학교를 상상하고 있었나요?


A. 서울에서 대안학교를 만든다는 게 첫 시도였는데, 뜻만 갖고 모였잖아요. 당시에 사람들이 모았던 뜻이 ‘다시 다니고 싶은 학교’에요. 우리 세대는 군대 같은 학교에 트라우마가 많은 사람들이에요.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아이들을 억압하거나 입시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수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뜻은 있었지만 헤매고 있을 때 큰 도움을 주신 분이 있어요. 대안 교육에 경험이 있으셨던 조한혜정 선생님이 성미산학교 초대 교장을 맡아주셨고, 길을 딱 제시해 주셨어요. “마을학교로 가야 한다. 마을의 공동체 생활에서 학교가 큰 역할을 해줘야 하고, 학부모들도 교육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렇게 방향을 제시해 주셨어요.



Q. 마을학교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세요.


A. 성미산마을의 가치는 ‘네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에요. 성미산마을에 온 사람들은 경쟁사회가 싫어서 온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더불어 행복하게 살자는 가치를 학교에서 어린아이 때부터 배웁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할머니의 밥상 프로젝트’ 수업을 해요. 아이들에게 요리하는 법을 알려주고 같이 실습해서 망원동에 계신 어르신들에게 식사를 대접해드리고, 날을 정해서 안마도 해드리고 있어요.



Q. 졸업할 때까지 학생들이 어떤 것들을 더 배우나요?


A. 6학년부터 10학년까지를 저희는 중등과정이라고 부릅니다. 7학년이 되면 15명의 지원자를 받아 홍천의 농장학교에서 1년 동안 농사를 짓고 옵니다. 벼, 감자, 고구마, 무, 배추, 가지. 온갖 작물들을 직접 농사를 지어서 마을에 가져와 팔아요. 그리고 10학년이 되면 해외 이동학습을 가요. 제 아들은 11학년 때 인도를 3개월 갔는데, 여행을 가는 게 아니에요. 독일, 대만, 네팔 등 해외에 공동체 마을들이 많이 있어요. 거기 가서 그 사람들과 밥 먹고 함께 생활합니다. 11학년과 12학년은 포스트 중등과정으로, 졸업 이후에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자기 스스로 모색하고 선생님들이 도와주는 과정이에요. 제 아들은 손재주가 있고 건축과 목공에 소질이 있어서, 건축사무소에서 인턴을 하고 졸업 후에는 한옥 학교에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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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활동을 담은 사진들이 1층 벽면에 걸려있다. 오른쪽이 ‘할머니의 밥상 프로젝트’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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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전환을 모색하는 ‘절전소 프로젝트’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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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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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외부 모습. 학생들이 제작한 자전거 거치대가 사용되고 있다. ⓒ여동준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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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의 고양이 급식소 ⓒ여동준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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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중등과정에서 벽화 수업이 진행돼 학생들이 교실 벽을 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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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옥상에 위치한 텃밭(‘꽃잎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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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행주에 거주하고 있는 김우(느리) 씨



Q. 성미산마을 사람들의 별칭은 어떻게 정해졌나요?

A. 마을에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시작할 때 선생님들이 별칭이 있었어요. 학력, 경력, 나이를 뛰어넘어 수평적 관계에서 부르는 호칭이 좋아보여서 부모들도 별칭을 갖자고 제안을 했어요. 저는 두 가지 의미를 담아서 지었는데요. 하나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영합하면서 살지 않겠다. 느리게 살겠다. 또 하나는 늘 변함없이 가슴에 간직하는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살겠다. ‘느리다’와 ‘늘’, 두 가지 뜻을 담아서 ‘느리’라는 별칭을 지었어요.


Q.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를 만든 계기가 궁금해요.

A. 저는 아이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낸 게 2004년, 이사를 온 건 2007년이에요. 재개발이나 재건축이 이뤄지고 공동체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공동체 주택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도심 속에서 주거문제를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분위기가 있었죠. 몇 명의 사람으로 이루어진 마을기업 소행주에서 공동체 주택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어요. 그런데 빵은 몇 천원이니까 사 보고 맛이 없으면 다음에 안 사면 되는데, 집은 그런 문제가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이 신중하잖아요. 그럴 때 마을기업 소행주 멤버였던, 지금 601호에 사는 ‘박짱’과 401호에 사는 ‘야호’가 입주하겠다고 했죠. 이들과 공동체주택을 해보겠다고 손을 든 사람들이 모였어요.


Q. 집의 공간을 직접 구성할 수 있나요?

A. 먼저 기본 설계도를 받아서 방, 욕실, 주방의 위치를 보고 저희가 옮겼어요. 아홉 집이 구조가 다 달라요. 저는 방 3개를 붙이고, 맞은편에는 옷장을 나란히 놓고 싶었어요. 그러면 방 3개가 딱 붙어있으니까 복도가 길어지잖아요. 저희 집은 ‘숨는 집’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느린 세상의 탐색 속에서도 상처받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 숨어들 수 있는 공간이 내 집의 내 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방 세 개 중에 맨 끝 방이 제 방이에요.


Q. 공동체주택만의 특징이 있을 것 같아요.

A. 공동체주택이니까 ‘씨실’이라는 공용 공간이 있어요. 각 집이 한 평씩을 추가로 샀어요. 거기서 밥 먹고, 술 먹고, 회의하고, 영화보고, 음악도 듣고. 우리가 각자 부유하다면 집 안에 영화감상실을 만들어서 자기만 누릴 텐데 그렇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공용 공간에 스크린과 음향시설을 두고 경기를 본다든지, 예전에 ‘나는 가수다’ 할 때 모여서 맥주 한 잔 하면서 함께 봤어요. 그리고 씨실에서는 매일 ‘저녁해방모임’이 열려요. 저희가 일주일마다 저녁해방모임 당번을 정해서 그 사람이 식단을 정하고 장을 봐요. 그러면 ‘해당화’ 님이 오셔서 밥과 반찬을 해 주세요. 12가구가 참여하는데, 와서 덜어 먹고 자기가 먹은 그릇과 수저를 닦아 놓고 가면 돼요. 한 달에 해당화의 품비용과 재료비로 한 가구가 24만 원을 내는데, 보통 4~5인 가구가 월화수목금 저녁을 거기서 해결하니까 굉장히 저렴하죠.


Q. 소행주 1호에서 지내면서 느낀 장단점을 꼽는다면?

A. 소행주 1호는 마을 안팎에서 보기에 가장 화목한 공동체에요. 우리는 소행주 사람들을 식구라고 불러요. 식구는 밥을 같이 먹는 사이잖아요. 되게 든든하고, 가까이에 있으면서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에요. 단점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자타공인 ‘소행주 홍보대사’라고 할 만큼 되게 행복하게 살아요.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온전히 오롯하게 누리는 것과 같이 어울려서 술 마시며 노는 것, 두 가지를 좋아하는데 둘 다 충족되니까. 5층에 사는 밤비의 딸 강산이가 작년에 결혼을 했는데, 예비 남편이 와서 저희가 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해 씨실에 모였어요. 게임도 준비하고.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까 우리랑 한 번씩만 건배해도 신랑은 엄청 마시잖아요. 12시 가까이 돼서 헤어졌는데, 막 밝게 웃고 적극적으로 해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거워했어요. 근데 문 열고 나가서 걸어가면서 계속 토하면서 갔대요. 웃긴 건 우리가 (가족이 아니니까) 결혼에 대해 찬성을 말할 게 아닌데, 사람들이 “난 합격이야”, “난 좋아”라고 말할 때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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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행주의 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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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공간 씨실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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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행주 옥상 창고의 내부 모습. 주민들은 이곳에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을 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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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두레생협 사무국에서 일하는 서순현(사탕) 씨



Q. 자신을 소개해주세요.


A. 저는 별칭이 사탕이에요. 매장 점장을 했을 때부터 가방에 사탕을 넣어 다니거든요. 이 콩알만한 사탕을 아이들 입에 하나 넣어주면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듯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엄마들은 아이가 안 징징거리니까 편하게 장을 보잖아요. 아이들에게 사탕을 하나씩 물려주다 보니 별칭이 사탕이 됐어요.



Q. 이곳의 생활협동조합(생협)을 언제 처음 알게 되셨나요?


A. 98년도 8월에 서교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2001년의 어느 날, 우리 집 앞에 생협 사무실이 오면서 ‘마포두레생협’이라는 간판이 졸졸졸 올라가고 있는 거예요. 유모차를 밀고 들어오면서 뭐 하는 곳인지 물었더니 설명을 해줘서 그 자리에서 조합원 가입을 했어요. 제가 좀 오지랖이 넓어요. 집 앞이 사무실이었으니까 비 오면 부침개 부쳐서 사무실에 갖다 주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생협 속으로 쑥 들어왔어요. 그러면서 생협 2기 이사도 했는데, 조합원들이 일주일에 한 번 배달로 공급을 받으니까 갑자기 손님이 오면 식재료를 사러 망원시장으로 가게 된대요. “우리 가족은 생협의 친환경 식재료를 먹는데 손님이 오면 시장에 가야 하는 게 마음이 안 좋다. 우리도 매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가 조합원이 380명 될 때였거든요. 조합원들이 출자를 더 하고 으쌰으쌰해서 12평 가게를 얻게 됐어요. 그게 협동조합의 힘이죠.



Q. 울림두레생협처럼 성미산마을에는 두레라는 이름을 가진 공동체가 여럿이네요?


A. 마포두레생협일 때, 중랑에 있는 조합원들이 ‘우리 모두의 조합’이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이름으로 바꿔보자고 건의를 했어요. 1년에 걸쳐 조합원들이 공모하고 회의해서 울림두레생협으로 명칭을 바꿨어요. 역사 공부할 때 두레와 향교라는 말을 듣는데, 그 안에는 나라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있어요. 예전에 생협이 조합원들의 일자리 공동체를 지원해 준 적이 있어요. 그 결과 비누두레에서부터 한땀두레, 되살림가게까지 경력단절 여성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일자리 공동체가 생겼어요. 사람들이 되살림가게에 자신은 작아서 못 입지만 다른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옷을 가져와요. 집에 두면 애물단지인데 나오면 보물이 되는 옷을요. 이렇게 일자리 공동체 차원에서 만들어져서 지금은 마을기업이 된 곳들이 다 생협에서 출발을 했어요.



Q. 서울대에도 생협이 있지만 생협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아요.


A. 생협은 가입만 한다고 해서 조합원이 되는 건 아니에요. 조합원은 열심히 생협을 이용해야 하고, 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산자도 생각해야 하고,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해요. 마트 가면 물건을 돈 주고 사면 끝나잖아요.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도 없죠. 근데 생협은 이걸 만든 생산자의 마음까지도 알 수 있어요. 생산자는 농약의 유혹이 올라올 때 나를 믿고 주문해 주는 조합원을 생각하잖아요. 조합원은 그런 마음으로 생산하는 생산자를 생각해요. 모양은 예쁘지 않지만 건강한 생활재. 그래서 생활재 하나를 취급할 때도 그 생활재에 대한 가치까지 함께 고민해요. ‘이 가격은 조합원이 갈등 없이 살 수 있는 가격일까? 이렇게 낮게 취급하면 생산자는 먹고 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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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두레생협 성산점의 외부 모습



Q. 울림두레생협이 추구하는 가치들을 설명해주세요.


A. 가장 큰 가치는 먹거리 안전성이에요. 시중에 나오는 연어는 다 노르웨이산 연어잖아요. 노르웨이 같은 경우는 EU 미가입국이어서 디플루벤주론(diflubenzuron)이라고 양식할 때 바다에 사는 이를 죽이는 농약을 써요. 근데 우리나라에는 수산물에 디플루벤주론을 안 쓰기 때문에 식약처에서 검사할 때 그 약이 잔류하는지 검사하는 데 기준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울림두레 조합원에게 연어를 먹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조합원들이 연어를 살지 말지 선택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말도 맞아요. 하지만 “왜 여기는 연어를 안 팔아요?“라고 물어봤을 때 우리가 설명을 하자고 결정했죠. 두 번째는 환경. 강원도에 조그맣게 친환경으로 농사지은 로컬푸드를 갖다 팔아요. 농약을 안 치기 때문에 수질 보호가 되고 소작농도 보호할 수 있죠.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쓰레기와 플라스틱을 줄이는 것까지 하고 있어요. 마지막은 돌봄인데요, 울림두레생협이 생협계에서 처음으로 돌봄 사업을 시작했어요. 어르신 방문 요양 사업과 조합원이 조합원을 돕는 생활 응원을 하고 있어요. 아이 봐줄 사람이 없으면 조합원이 소정의 응원비를 받고 아이 돌봄을 해주고, 또 아플 때는 가서 밥도 만들어주고. 조합원이 응원 요청을 하면, 다른 조합원이 요청에 응해주는 거죠. 이렇게 같이 사는 사회를 만들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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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두레생협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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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협에서 판매하는 생활재에 건강 유의사항이 명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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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협을 포함한 마을 내 162개의 공동체가게에서는 지역공동체화폐 ‘모아’가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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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협 내의 ‘꼬물이 부엌’에서는 조합원들의 요리강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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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림가게의 물품 기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