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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 모일 때 드러나는 것이 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2016)’
등록일 2019.09.09 22:19l최종 업데이트 2019.09.13 00:25l 김나연 기자(pbgaprn282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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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시인 윤동주를 기억한다. 청년 윤동주는 옥사했지만 그의 정신은 한 권 시집에 담겨 이어졌다. 영화 동주는 그의 시 너머에 있는 인간 동주를 바라보고자 한다. 영화 속 동주의 흔들리는 눈빛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동주의 시선 끝에 그의 이상이 있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대사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인다. 신앙을 갖고 뭉쳐 살던 마을에서 어느 날 교회 학교를 인민 학교로 바꾼다는 말이 들려온다. 신앙이 사람들을 현실에 안주하게 만든다고 믿었던 몽규는 이에 당장 찬성한다.

 

  그런 몽규에게 동주는 그래도 신앙 덕분에 우리 마을이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인민 학교의 필요도 인정하지만, 교회 학교도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는 항변이다. 동주는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신앙이 주는 힘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에 몽규는 그래, 계속 견뎌라 니는 말을 남기고 다른 이를 설득하기 위해 떠나버린다.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고 이념에 잘 매료되는 몽규는 동주의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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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의 안팎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둘 ⓒ영화 '동주' 공식 스틸컷



  어두운 시대 속에서 고통받는 민족을 보고 몽규는 분노했지만, 동주는 슬퍼했다. 몽규는 분노를 원동력 삼아 현실을 변화시키려고 했기에 동주를 이해하지 못한다. 울 시간에 뭐라도 하겠다는 게 몽규의 생각이다. 반면 동주는 힘든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미안함에 슬퍼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는 공감이 가진 가치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갈등은 성냥불처럼 촉발되자마자 사라진다. 서로의 이상은 이해하지 못해도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서로가 아니어도 주변은 슬픈 일투성이였다. 그러나 해결되지 못하는 갈등임은 분명하다. 다시 싸움을 시작한 쪽은 몽규였다. 몽규는 문예지를 만들던 중 지면에서 시의 분량을 줄인다. “자기 생각 펼치기엔 산문이 좋다는 것이 그의 이유다. 거기에 문학은 인민을 나약한 감성주의자로 만드는 것이란 말도 덧붙인다. 세상을 당장 변화시켜야 하는 몽규는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언어를 손에 쥐어야 했다.


  문학의 언어를 일종의 도피로 여기는 몽규의 말은 동주를 자극한다. 동주에게 시는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만든 허상이 아니었다. 동주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살아 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얻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말한다. 동주는 문학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선전이나 이념을 위해 문학을 이용하는 시도엔 반대한다. 동주의 말은 때로 낯설고 추상적이라서 힘을 잃기도 하지만, 문학이 가진 가치를 이해하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감정은 동주가 나아가야 할 길을 선명히 비춘다.

 


영화가 동주의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

 

동주와 몽규의 관계는 관객으로 하여금 동주라는 제목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몽규의 비중이 동주와 거의 동등하기 때문이다. 특히 송몽규가 실존한 독립운동가란 배경은 몽규의 목소리에 힘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몽규와의 대립을 통해 동주의 목소리는 힘을 갖게 된다.

 

몽규의 목소리는 동주가 자신의 당위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시각화하기 어려운 윤동주의 내밀한 갈등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의 속마음을 화면 위에 비추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동주가 필요하다. 독백에 가까웠던 그의 성찰을 스크린 위에 녹여 내기 위해 영화는 몽규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켠다.

   

동주는 시에 대한 사랑을 품속에만 고이 간직한다.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문학이 가진 가치에 대한 논의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독립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괄시하는 몽규의 태도 앞에서 동주가 숨기려고 했던 시에 대한 사랑은 울컥하는 설움으로 쏟아진다. 동주는 문학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움직임으로 시에 대한 사랑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몽규가 있었기에 동주도 깊은 마음 속에만 감추고 있던 에 대한 사랑을 불쑥불쑥 터트릴 수 있었다.

 

 

한순간으로 정의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

 

  둘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서, 화면 위엔 망설이는 동주의 얼굴과 흑백의 단조로운 풍경들만이 지나친다. 영화는 동주의 망설임과 부끄러움이 담긴 순간들을 고요히 담아낸다. 이 순간들이 결국 동주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말 속 두 청년의 울부짖음은 영화가 차곡차곡 쌓아 온 동주의 순간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기 쉽다.

 

  영화의 큰 줄기는 순사가 동주를 신문하는 과정이다. 극에서 순사의 의무는 육체적 고문이 아니라 정신적 고문에 있다. 이제껏 몽규가 자극해 온 동주의 양심을 일본인 순사가 한층 더 집요하게 파고들며 잔인함은 본격화된다. 그는 동주가 몽규와의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혼자선 결정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망설임의 끝에 항상 몽규의 그림자가 됐던 과거를 동주는 회상한다.

회상의 종점에서 동주는 눈물을 흘리며 이 시대에 태어나 시를 쓰려고 한 게 부끄럽다고 말한다. 독립운동을 했으니 서명하라고 채근하는 순사 앞에서 그는 과거를 뉘우치는 듯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감히 독립운동을 했다고 서명할 수 있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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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받는 동주 ⓒ영화 '동주' 공식 스틸컷



  동주는 일제강점기를 살며 독립운동을 하지 못한 과거를 반성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는 비겁자의 모습은 윤동주를 이해하는 좋은 방향이 아닐 것이다.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토해낸 반성 동주의 부끄러움 전체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동주는 부끄러워했다. 문학 속에서 본 희망을 놓지 못하고 수없이 망설였던 순간이 모두 부끄러움이었다. 시를 쓰지 말고 시대를 위해 움직여야 했다는 깨달음 뒤에 반성처럼 따라붙는 감정으로 동주의 부끄러움을 환원하는 것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요동치는 그래프 속의 한 지점만을 찍어 보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영화는 동주 내면의 고뇌를 대사로 만들기 위해 인물들로 하여금 동주를 추궁하는듯한 모양새를 만들어냈지만 사실 를 누구보다 괴롭게 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동주가 보여준 부끄러움의 미학은 자기반성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동주의 부끄럽다는 말 안에는 동주가 고뇌하고 참회했던 모든 순간들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그 말을 꺼낸 것은 한순간이지만, 그 말이 설명하는 것은 그의 생 전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