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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체험하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바바라 크루거: 포에버' 展
등록일 2019.09.10 00:51l최종 업데이트 2019.09.11 16:07l 최재혁 기자(coliu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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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미술가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세계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광고’다. 잡지사 디자이너로 일했던 그는 소비주의 내지 상업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을 위해 역설적으로 광고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의 작품은 많은 경우 흑백의 사진 위에 붉은 배경의 직관적인 문구를 병치하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작가의 개인전 ‘바바라 크루거: 포에버’에서도 이러한 측면은 여전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러나 전시는 동시에 작가의 작업이 보여주는 다른 특징에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며, 그의 작품이 이미지의 틀을 넘어 갖는 예술적 가치를 보여주고자 한다.


공간을 작품으로

  전시관은 지하 1층에 위치하고 있지만 전시는 그 전에 이미 시작된다. 건물 로비에서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문 옆 벽 하나를 검은 배경에 쓰인 흰 글자 ‘Plenty Should Be Enough(충분하면 만족하라)’가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장의 사진에 온전히 담기 어려울 정도의 높이와 너비기 때문에 관람객은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며 볼 수밖에 없다. 활자에서 빠져나와 전시관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면 이번엔 시선이 가 닿는 위치에 걸린 작품 ‘Shame It Blame It’을 맞닥뜨리게 된다. 작품 속 인물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얼굴을 잡힌 채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도구로 눈을 찔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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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작품은 각각 넓은 로비와 계단 벽면이란 공간에 맞아떨어지며 관람객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유도한다. 전시의 시작을 여는 일련의 작품들은 ‘공간’이란 개념이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하겠단 인상을 남긴다. 전시관 한편에서 재생되고 있는 인터뷰 영상 속의 바바라 크루거는 ‘건축은 나의 첫사랑이다. 나는 그저 머릿속 생각들을 공간으로 입체화시킬 뿐’이라고 단언하며 관람객의 감상에 근거를 부여한다.

  본격적으로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면 처음 시야에 들어오는 작품 ‘Untitled (Forever)(무제 (영원히))’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작품은 이제 단지 전체 공간에서 작은 일부를 차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 자체로 격상한다. 천장을 제외한 네 벽과 바닥은 모두 흑백의 글자들로 메워져 있다. 방에 들어선 관람객은 단순히 감상자의 위치에서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자신을 압박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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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Forever)'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저절로 이해되는 예술은 없다

  ‘Untitled (Forever)’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활자로 직접 쓰여 있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생각보다 긴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바닥의 글자를 읽기 힘들다는 기술적인 측면 때문이라기보다는, 작품 자체의 본질적인 속성에 가깝다. 작품의 입구를 기준으로 전후의 벽과 좌우의 벽의 글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배치됐다. 전후의 벽에 제시된 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중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원래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력을 가진 거울 같은 역할을 해 왔다’는 서술에 맞게 거울 형태로 일그러져 있다. 좌우의 글자는 '결국에는(In The End)'이나 ‘전쟁(War)’과 같은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가로로 켜켜이 쌓음으로써 의도적인 피로를 유발한다. 관람객은 텍스트 사이를 넘나든 뒤 최종적으론 이를 묶는 ‘Forever’라는 부제가 어떤 의미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바바라 크루거의 다른 작품을 두고 ‘이것을 설명적 삽화 이상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과연 있는지’라고 물은 미학자 매튜 키이런처럼, 광고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전유하는 작가의 작업 방식은 예술치고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지적을 마주하기도 한다. 관람객의 능동적인 참여와 생각을 요구하는 ‘Untitled (Forever)’의 구조적 특징은 전시의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며 이런 비판의 날을 무디게 만든다. 복도로 나온 관람객은 붉은 바탕에 쓰인 흰 글자 ‘제발 웃어 제발 울어’를 보게 된다. 작품의 뜻은 명확하면서도 하나의 의미로 좁혀지지 않는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현대인에 대한 제언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감정노동을 강제하는 압박의 말일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관람객은 주어진 작품의 의미를 읽어내는 위치를 넘어 나름대로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로 호명된다.

  좁은 복도를 나와 드러나는 넓은 방에서 관람객은 작가의 초기 연작을 보며 이러한 다층적인 의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연작 중에는 낙태 논란을 정면으로 겨냥한 ‘ Your body is a battleground(당신의 몸은 전쟁터다)’나 남성의 근육에 놀라는 여성의 이미지 위에 더한 ‘We don't need another hero(우리는 다른 영웅이 필요하지 않다)’처럼 직관적인 문장도 있지만, 모호하고 다층적인 질문을 던지는 문장 또한 존재한다. 흑백으로 처리된 사람의 얼굴 위로 놓인 ‘Who is free to choose(누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가)?’나 ‘Who is beyond the law(누가 법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가)?’라는 질문만으론 작가가 목표로 하는 집단이 누군지 분명치 않다. 그것은 페미니즘의 틀에서 남성에게 건네는 말일 수도 있고, 무차별적 소비를 조장하는 기업을 겨냥한 말일 수도 있다.

  전시 막바지의 영상 작품 ‘The Globe Shrinks(세계는 줄어들고 있다)’는 작가가 관람객에게 요구하는 능동적인 태도를 영상 간의 대비와 중첩을 이용해 분명하게 시각화하며 전시를 마무리 짓는다. 작품 속 영상은 한 화면에서 일관적으로 재생되지 않는다. 두 인물 간의 대화를 마주보는 두 화면에 나누어 보여주기도 하고, 서로 다른 종교의 예배 장면이 일정 간격을 두고 네 벽을 가득 채우는 모습으로 끝나기도 한다. 여러 개의 부제로 나뉜 영상 속에서 감상자는 스탠드업 코미디의 관람객, 폭력의 현장에 있는 목격자 등 다양한 입장을 경험할 수 있다.

  영상을 보기에 앞서 관람객은 사면에서 모두 영상이 나온다는 정보만 알 수 있다. 특정 시점에 어느 방향에서 영상이 재생될지는 알 수 없기에 관람객은 신경이 곤두선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운전하는 여성의 통화 내용에 집중하다가도 해당 여성의 운전 행태에 분노를 표출하는 남성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함’과 ‘정교함’ 사이

  다만 작가가 인터뷰 영상 속에서 자신은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예술을 지향한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전시의 작품들 대부분은 ‘단순한 예술’과 ‘정교한 예술’ 사이 경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접 써놓았기에 관람객은 이를 단초로 작품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기 연작이 전시된 넓은 공간에 딸린 작은 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보다 직관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띤다. 여섯 개의 이미지로 구성된 작품 ‘Untitled (Project For Dazed and Confused)’는 사진 위 문구가 간결하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흑백의 사진과 붉은 텍스트 상자가 대비되는 작가의 전형적인 양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긴 독백은 표면적으론 관람객에게 부담으로 다가오지만, 영어를 독해할 수 있다면 ‘누가 창의력을 상관하겠어?(Who cares about creativity?)와 같은 문장에서 그 의미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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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Project for Dazed and Confused)' 중 일부



  물론 그의 모든 작품이 단순한 예술이라는 비판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다른 방에 걸린 작품 ‘Untitled (Good Buy)’는 조금 더 직관에 의존한다. 작품은 검은 바탕에 쓰여 있는 ‘Good Buy(싸게 잘 샀다)’라는 활자가 전부다. ‘Good Bye’라는 인사말을 비틀어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을 의도했음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전시의 다른 작품에서 보여준 공간에 대한 숙고를 제외했을 때 이 작품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선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그럼에도 전시는 분명 직설적인 이미지로만 국한되지 않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담았다. 전시에 처음으로 공개된 한글 작품 ‘충분하면 만족하라’(‘Plenty Should Be Enough’의 한글 버전)와 ‘제발 웃어 제발 울어’는 작가가 여전히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는 여운을 남긴다. 익숙한 영어에서 벗어난 한글 활자는 메시지의 전달 방식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고민을 보여주는 듯하다.


관람 가능 시간: 10:00~18:00 (월요일 휴관)
관람요금: 성인 기준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