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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웨이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그대 볼룸(Ball-Room) 행사 ‘Her Ball’
등록일 2019.10.21 16:23l최종 업데이트 2019.10.24 15:47l 한지우 기자(lhanjiwool@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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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선을 통과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탈락한 사람은 왼쪽으로 가라는 사회자의 설명이 울려퍼진다. 런웨이를 걷는 참가자들의 표정은 난생 처음 주목을 받아 얼떨떨하다. 그러나 이내 모두가 하나 된 분위기 속에서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 을 받으며 자신의 무대를 만끽한다. 언제나 사회의 주변에 위치했던 이들이 공간 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미국 뉴욕의 LGBIQ 커뮤니티에서 시작돼 한국으로 날아온 볼룸(Ball-Room) 문화의 현장, 8월 31일 개최된 ‘허볼(Her Ball)’을 찾았다.


이상한 가족들의 무도회장 

  행사는 주최자 하우스 오브 허벌(House of Herbal) 가족의 무게감 있는 행진과 함께 시작됐다. 하우스의 ‘마더’인 포샤(예명)를 가운데 두고 걷는 이들의 모습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보다도 하나 된 모습이었다. 이어진 행사에서 사회자가 한시도 빼놓지 않은 ‘우리 가족들’이란 말은 볼이 단순한 대회장이 아니라 퀴어들의 가족 행사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볼룸 문화의 원형은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던 비백인계 성소수자들이 자신들만의 무도회장인 볼에서 보이고 싶은 모습을 뽐내고 겨루던 것이었다. 이후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하우스란 독특한 대안가족 문화가 싹을 틔웠다. 볼에서 인정받은 일부가 생물학적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성소수자들을 ‘마더’ 혹은 ‘파더’로서 자신의 가족으로 품기 시작한 것이다. 하우스는 거주 공간을 공유하거나 서로의 생활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등 성소수자들만의 가족공동체로 자리매김했다.

  하우스 오브 허벌의 시작은 가족보단 볼룸 행사 개최를 위한 프로젝트 팀에 가까웠다. 본래 페미니즘, 드랙 등의 접점을 가지고 친분을 유지하던 5명이 볼을 개최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아 행사 기획을 시작했고, 주최자로서 하우스를 구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포샤를 마더로 한 하우스를 결성했다. 허볼을 만들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이들은 진짜 가족이 됐다. 함께 거주하는 생활공동체는 아니지만 이들은 대부분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자신보다 서로의 생활을 더욱 챙긴다. 달해빛(예명)은 성소수자로서 언제나 불투명한 삶을 살아왔지만 하우스를 만난 후로 앞으로의 삶을 기대하게 됐다며 “가족 말고는 (이들의 존재에) 달리 이름 붙일 게 없다”고 이야기했다. 금개(예명) 씨 또한 “무언가를 하기 위해 정상사회의 규범과 타협해야 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젠 가족들과 함께할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싶다는 원동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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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허벌 ⓒ감나무(instagram.com/gam_namu4)


  이렇게 “서로에게 용납의 세계가 돼준다”는 하우스 오브 허벌은 그들의 공동체를 넘어 한국의 성소수자들에게 ‘용납의 세계’를 만들어주기 위해 허볼을 열었다. 본 행사 시작 전 하우스 오브 허벌 외에도 다양한 하우스들이 행진했다. 스스로가 선택한 가족들과 손을 잡고 당당하게 걸어나오는 모습만으로 행사장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족쇄 없이 자신을 표현하기

  허볼엔 누구도 익숙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이 서울 한복판이란 사실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이 보이고 싶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첫 카테고리였던 허벌(Herbal)이 열림과 동시에 그들이 무대의 런웨이 위를 걷기 시작했다. 볼 행사는 크게 패션과 퍼포먼스로 나눠진 각 카테고리에서 심사위원의 판정을 통해 우승자를 가린다. 패션에선 주제에 맞는 의상과 함께 런웨이 워킹과 연기를, 퍼포먼스에선 춤 또는 립싱크 공연을 선보이게 되는데, 예선 합격을 받은 참가자들에 한해 토너먼트가 진행된다. 특히 웨딩( W e d d i n g ) , 일 반 리 얼 니 스 ( I l b a n -realness), 바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등 기존 볼과 차별화한 허볼의 패션 카테고리가 눈에 띄었다. 하우스 오브 허벌은 “뉴욕의 볼과 기존에 한국에서 이뤄진 볼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페미니즘적 가치를 지키고자 한 고민의 결과물이었다”고 설명했다. 기존 볼의 체계를 존중하되, 얼굴 생김새부터 성형 여부까지 평가하는 페이스(face) 카테고리처럼 페미니스트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은 재창조하려 한 것이다.

  바디 포지티브는 주최 측의 고민이 잘 묻어난 카테고리였다. 여러 측면에서 스스로의 신체를 부정하던 성소수자들이 있는 그대로의 몸을 인정하는 기회로서 마련됐다. 참가자들은 카테고리에서 자신의 몸을 다양한 방식으로 긍정했다. 셔츠를 풀어 배 위에 휘갈겨 쓴 “I Am the Beauty”라는 문장을 보여주며 워킹한 우승자와 같이 평소 드러내기 어려웠던 신체의 일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 참가자들이 많았다. 다른 참가자였던 시몬(예명) 씨는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Your body is a battleground’를 재해석해 ‘My Body is a battleground’로 표현한 의상을 선보이기도 했다.

  바디 포지티브 카테고리엔 사전에 참가신청을 하지 않고 현장에서 참가한 이들도 다수였다. 볼에선 참가순서나 경쟁상대를 정하지 않고 사회자가 계속해서 외치는 “워킹할 사람은 누구든! (Anybody Walking)”에 따라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무대에 올라 워킹을 선보인다. 이때 사회자의 말을 따라 현장에 있는 누구나 즉흥적으로 참여를 결정할 수도 있다. 행사를 관람하고 있던 사람들은 무대 위의 사람들이 무엇을 표현하건 응원을 보내는 분위기에 어느새 런웨이를 걷고 있었다. 한 참가자는 “원래는 (참여할) 생각이 없다가 옆에서 나가보라는 말에 갑자기 참가를 결정했다”며 “워킹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로 걷는 나에게 보내주는 환호가 감동적이었다”고 소감을 표현했다.

  행사장이 순식간에 잡상인이 얼음물을 파는 1호선 지하철로 변하기도 했다. 볼룸에서 리얼니스(Realness)란 진짜로 무언가가 돼보는 것을 뜻한다. 회사원 리얼니스 등이 전통적 예시인데, 성소수자들이 사회에선 얻기 어려운 지위를 실제와 똑같이 연기하며 정상사회에 속하고 싶은 욕망을 간접적으로 충족하거나 정상사회의 역할적 모순을 풍자하는 복합적 문화다. 허볼에선 성소수자들이 흔히 스스로를 이르는 말인 ‘이반’의 반댓말인 ‘일반’을 보여주는 리얼니스 카테고리가 열렸다. 결승에 올랐던 얼음물을 파는 잡상인 참가자와 1호선 지하철의 장년 남성 참가자가 관객석 옆을 지나갈 때면 관객들은 ‘저들이 여기 왜 있지?’하며 흠칫 놀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잡상인 리얼니스로 우승을 차지한 소다(예명)는 “퀴어 퍼레이드에 관심 있지도 않은 상인들이 단지 사람이 많으니 돈을 벌기 위해 나온다”면서 “남을 신경쓰지 않고 그럴 수 있는 게 매우 권위적이라 느꼈던 경험을 리얼니스로 표현했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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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포지티브 카테고리의 "My Body is Battleground" 참가자(좌) 

ⓒ감나무(instagram.com/gam_namu4)와 

일반 리얼니스 카테고리 등산객 남성 참가자(우) 

ⓒ감나무(instagram.com/gam_namu4)


  허볼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무대 위에서 약혼식이 펼쳐졌던 순간이다. 붉은 드레스가 영화 ‘어바웃타임’을 연상시킨 달해빛 커플은 무대를 걸은 후 서로의 손에 약혼 반지를 끼웠다. 무대 앞쪽에 앉아있던 하우스 오브 허벌의 마더 포샤는 진짜 약혼식처럼 둘을 번갈아 껴안았고 관객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쳤다. 달해빛은 “처음엔 사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준비의 시작부터 (런웨이의 시작부터 끝까지) 걸어갈 때까지 서서히 진짜 나의 약혼식이 완성됐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긴장돼) 손을 벌벌 떨며 반지를 끼웠는데 그것마저 감동이라 말해주는 하우스에게 진짜 축하를 받았다”고 당시를 그리기도 했다.


나를 무대의 주인공으로

  보그펨(Vogue Femme) 카테고리 참가자가 높은 힐을 신고 몇 바퀴를 돌다 점프한 후 곧바로 바닥에 누워 상체를 휜채로 한 다리를 들자 관객들은 열광했다. 볼 룸 문 화 에 서 탄 생 한 춤 인 보 깅(Voguing)은 패션잡지 <보그> 속 모델들의 포즈에 영감을 받은 동작들을 활용한다. 허볼의 카테고리였던 보그펨은 그 중에서도 골반과 가슴을 활용한 춤 동작들을 주로 보여준다. 현재 방영 중인 <M-net> 프로그램 ‘퀸덤’ 2회 방영분에서 그룹 AOA와 함께 무대를 꾸민 보깅 댄서들의 모습이 전파를 타며 대중들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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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누워 상체를 휜 채로 한 다리를 드는 보깅의 동작 딥(Dip) 

ⓒ감나무(instagram.com/gam_namu4)


  한국에서 보깅은 볼룸 문화를 전파한 주역이기도 했다. 허볼 전까지 한국에서 열렸던 볼은 모두 전문 보깅 댄서들에 의해 열렸다. 덕분에 춤의 한 종류로서의 보깅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알려졌지만 이로 인해 볼의 진입장벽은 높았다. 허볼에 자문으로 참여한 댄서 썬비치(예명)는 “볼룸은 댄서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까지의 볼은 볼룸보다는 보깅 문화로 흘러온 것 같다”며 “이제 볼룸으로 흐름을 이어가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허볼은 그 본격적인 첫 시도라 할 수 있다. 주최 측에서 마련한 사전 워크숍에서 썬비치에게 이틀간 보깅을 배운 사람들은 베이비 보그(Baby Vogue) 카테고리에 참여했다. 보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을 대상으로 예선 없이 진행하는 카테고리였기에 전문가가 아님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었다. 썬비치는 “볼의 규칙을 잘 모르는 등 미숙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댄서와 비댄서 간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소회를 밝혔다.

  참가자들은 디제이가 튼 음악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추며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심사위원들에게 돋보이기 위해 춤 동작을 통해 상대를 심사위원의 시야에서 가리는 모습은 관객들을 흥분시켰다. 특히 보깅에선 매 4, 8번째 박자마다 특징적인 동작들을 취하는데, 관객들은 그때마다 ‘아우’라고 소리치며 호응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든 참가자에게 손짓을 하며 응원하기도 했다. 화려한 동작들로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 관객들 또한 대회의 참가자였다.

  마지막 카테고리였던 립싱크는 유일하게 사전에 참가자들에게 참가곡을 받은 후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노래에 맞춰 의상, 메이크업, 안무 등 모든 것을 실제 콘서트 무대에 서는 것처럼 준비했다. 립싱크 공연 전문가인 드랙퀸들도 색다른 무대 앞에서 긴장한 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콘서트장으로 변한 행사장 안에서 참가자들은 ‘슈퍼스타’가 돼 스스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껏 쏟아냈다. 누군가는 휘트니 휴스턴의 ‘It’s not right but it’s okay’를 선곡해 성소수자로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고, 누군가는 한복을 입고 무지개색 딜도를 들고 나와 처녀막 등 한국의 ‘유교적 성관념’을 풍자했다. 참가자에겐 참던 것을 뱉어낸, 관람자에겐 가려운 곳을 긁어준 이중적 해방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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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입고 립싱크 카테고리 무대에 선 참가자 ⓒ감나무(instagram.com/gam_namu4)


  하우스 오브 허벌은 완전히 처음부터 만들어가야 하는 준비과정이 정말 힘들었다면서도 행사를 마친 소감을 묻자 “끝나자마자 모두가 내년에 또 하자고 말했다”고 답했다. 여전히 볼룸은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문화이기에 주최 측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해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언제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이들이 규정적 평가가 아닌 존재에 대한 축복을 받으며 관객과 심사위원 앞에 섰다. 퀴어, 페미니스트, 댄서, 드랙 등 모든 경계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안전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한데 어우러졌다. 족쇄에서 풀려난 해방감을 느끼며 런웨이를 가로지르 는 참가자와 그를 향해 환호를 보내는 관객, 허볼의 모든 이들은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