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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움켜쥔 책임감 구스타프 몰러 감독의 ‘더 길티’(2018)
등록일 2019.10.21 16:31l최종 업데이트 2019.11.09 22:43l 최재혁 기자(coliu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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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이 무너질 때

  좌천돼 임시로 긴급 신고 센터에서 일하는 경찰 아스게르에게 신고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건 여성 이벤은 자신이 전화를 건 곳도 정확히 모르는 듯 횡설수설한다. 아스게르가 술이라도 마신 거냐고 힐난하며 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이벤은 다급하게 드라이브 나왔다는 말을 꺼낸다. 여전히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발언이지만 아스게르의 태도가 바뀐다. 그는 동행이 있는지, 상대방이 전화한 사실을 아는지 따위를 묻더니 이윽고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납치 상황인가요?”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이벤이 딸 마틸데와 통화하는 양 대화를 이끌어가며 필요한 정보를 얻어낸다.

  이벤의 전화를 받기 전 다른 신고를 응대하는 아스게르의 태도는 냉소적이었다. 마약 복용 후 고통을 호소하는 신고자에게 “이해는 합니다만 자초하신 일이죠”라 말하는 한편, 홍등가에서 상대 여성에게 강도를 당한 남성의 전화는 실실 웃으며 대응한다. 이벤과 통화한 뒤 상황을 풀어 나가는 아스게르의 모습은 그에 대한 관객의 인상을 변화시킨다. 그는 마틸데를 통해 납치 용의자가 이벤의 전 남편 미카엘임을 알아내면서도 두려워하는 아이를 달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용의 차량을 찾는 일에 골몰하던 북부 교환대에 아이들 집에다 경찰을 보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그가 꽤 유능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미카엘이 칼을 소지한 상태로 나간 상황에서 마틸데의 동생 올리베르가 죽은 채 발견되며 상황은 더욱 긴박해진다. 아스게르는 교대도 하지 않고 미카엘과 이벤에게 계속해서 연락하며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후반부 이벤과의 통화에서 그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이벤이 아들의 뱃속에 뱀이 있다고 착각해 그를 죽였다. 아연한 미카엘은 딸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했고, 충동적으로 이벤이 과거에 입원돼있던 정신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 아스게르는 자리에서 멈춰 버린다.


선입견이 아닌 절차의 문제

  아스게르와 그를 지켜보는 관객이 가정하고 있었을 ‘남성에 의해 여성 및 아이에게 가해진 가정폭력’의 구도를 벗어남으로써, 영화는 이 대목에서 선입견의 위험에 대해 말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특히 전과 기록을 다루며 두드러진다. 교대를 거부하고 방에 홀로 틀어박힌 뒤부터 아스게르는 대화 속에서 미카엘의 전과 사실을 당연한 듯 언급한다. 과거 상사에게 사건을 설명하며 미카엘이 ‘전과자’고 아내를 납치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문장 속에서 미카엘의 전과 기록은 그의 납치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인 양 제시된다.

  그러나 아스게르의 실패를 선입견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해석은 지나치게 결과론적이지 않을까. 신속한 판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기존의 선입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남성에 의한 가정폭력’이나 ‘전과자의 재범 문제’ 등은 단순히 모든 잘못된 선입견 중 일부가 아니라, 여러 선례를 바탕으로 구축된 어느 정도 개연성 있는 판단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신고 센터에서 이벤의 상황을 단순 납치로 판단한 아스게르의 선택 역시 불가피했다. 동기에 있어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을 뿐, 어쨌든 미카엘이 납치를 감행했다는 사실 역시 바뀌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오히려 선입견보단 사건을 풀어가는 절차에 있는 듯 보인다. 교대 시간이 지난 후부터 아스게르는 신고센터의 절차를 무시한 채 자의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과거 동료 경찰에게 미카엘의 집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하는가 하면, 이벤이 아닌 미카엘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적인 도발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가 미카엘에게 “넌 사형시켜버려야 돼!”라 일갈하는 대목은 상징적이다. 미카엘은 분명 범죄를 저질렀지만, 아스게르는 결코 그 경중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조율하는 자가 처벌을 판단하는 위치를 넘본 순간에 실패는 예정된 셈이다.


“난 고의로 그랬지만 당신은 몰랐잖아요.”

  자연히 영화는 핵심적인 진상이 밝혀진 이후에도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다. 경찰로서 아스게르는 이미 수많은 실책을 저질렀지만 연락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알게 된 이벤이 자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벤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어두운 방 안에서 다시 밝은 사무실로 걸어나간다. 자신이 아들을 죽인 게 맞는지,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이벤의 물음에 그는 가장 필요한 말을 건넨다. “이벤, 고의로 그런 게 아니잖아요.”

  이벤은 그의 말에 설득되지 않는다. 그러자 아스게르는 의지에 찬 어조로 다음 말을 잇는다. 그 역시 사람을 죽였다. 범죄자였지만 아직 젊은 소년을 죽인 후, 내일 있을 재판에선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할 심산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너무 지긋지긋해서 뭔가를 없애버리고 싶었던 거예요. 나쁜 뭔가를”이라 돌아본다. 이제 이벤이 묻는다. “뱀처럼요?”  당신은 고의로 그러지 않았단 그의 말이 힘을 얻는 순간이다.

  영화 앞부분에 등장하는 아스게르의 옛 동료들은 내일 재판만 견디면 다시 원래 보직에서 일할 수 있다며 격려한다. 그들의 말을 듣는 아스게르의 모습은 미묘하다. 애써 반박하진 않으면서도 결코 편안한 표정은 아니다. 그의 태도는 이벤에게서 진상을 들은 이후 변화한다. 동료 경찰에겐 위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뒤, 모두가 지켜보는 사무실에서 이벤에게 하는 말을 빌려 진실을 고백한다. 그는 그렇게 과거의 잘못된 판단을 받아들인다. 나아가 마틸데에게 엄마를 꼭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발언에도 책임을 완수한다. 경찰이 이벤을 구했단 소식을 마지막으로 아스게르는 마침내 사무실을 나선다. 복도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받는 사람의 목소리는 밝혀지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선택을 안다.